저자를 오프라인에서 두 번 만났다. 첫 만남은 연구원 2차 레이스가 끝나고, 집단 인터뷰라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 저자의 집 근처인 청파동에 있는 카페에서였다. 한 시간 남짓, 그가 살아온 인생을 들었다. 사람을 좋아했던 저자는 독일에서의 큰 사건을 겪은 후,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얘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보는 이들의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부탁을 어렵게 수락해 주고, 소중한 시간을 할애 해 주었다.
(1)첫 만남에서 알게 된 저자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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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써의 그 : 그는 “나는 작가가 되려고 생각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라는 얘기를 했다. 그냥 살다 보니 ‘작가가 되어 있었다.’라고 얘기한다. 이 말을 들으니, 저자에게 ‘작가’라는 직업이 신의 섭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저자가 이야기 하는 ‘진짜 책’을 쓰는 작가다. 사회가 듣고 싶어 하는 소리, 그리고 사회가 귀기울여야만 하는 소리들을 책에 담는 작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했듯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 잘 알고 있는 현대에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설파하고 있는 이 시대의 철학자이다. 또 한편으로 드는 궁금점은 ‘만약, 어릴적부터 저자의 꿈이 작가였다면 과연 어땠을까?’였다.
-진짜 전업주부 : 저자가 사는 동네의 세탁소 아저씨와의 일화, 온갖 집안 대소사를 챙기느라 책읽고 글 쓸 시간이 없다는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15년차 전업주부의 포스. 그리고 당시 저자의 말에 겪하게 공감했던 또 다른 전업주부들의 반응들을 보니 저자는 정말 그를 인터뷰했던 대학생들이 쓴 글에서 보았던 ‘전업주부로서의 저자’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작가 : “세상에 작가는 많지만, 인간성까지 좋은 작가는 드물다.”고 얘기한다. 이 말은 내게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라”로 들렸다. 한 시간 내내 너무 겸손한 저자를 보니 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나도 저런 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와의 두 번째 만남은 지난 7월 오프수업 때였다. 오자마자 저자는 우리에게 10페이지 짜리 페이퍼를 주셨다. 그리고 한 시간이 넘는 강의 시간내내 열정적으로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무척이나 유쾌하고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2)두 번째 만남에서 알게 된 저자
-준비성이 철저한 작가 : 한 시간 강의를 하기 위해 일주일 내내 하이데거의 책 60여권을 다시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많은 분량의 글들을 10페이지로 간추려 주셨다. <신>을 쓰면서 참고한 문헌들의 리스트만 봐도 그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고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준비가 철저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저렇게 본인의 전문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분도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이렇게 준비하는데, 과연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재미있는 강의 : 강연 서두에 “나는 강의를 잘 못합니다. 내가 하면 재미가 없어요.”라고 시작한 강의는 저자의 말과 전혀 다르게 웃음이 빵빵 터졌다. <신>에서 볼 수 있었던 어려운 것을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능력이 글에서뿐만 아니라, 말에서도 자연스럽게 베어나왔다. 누가 아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던가. 저자 김용규는 ‘아는 것과 표현하는 것이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인 것 같다. 첫 모임에서도 느꼈지만, 어려운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 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 두 번 읽기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첫번째 읽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있다. “딸에게, 사랑과 함께” 라는 글귀였다. 첫 번째 만남에서 가족 이야기를 하던 중에 잠깐 따님의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저자는 딸을 정말 사랑하고 아껴주고, ‘친구 같이’ 편안한 아버지인 것 같다. 아마 저자가 사람들과 만나는 횟수가 적은 것-실제로 많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에 비해 외롭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그가 정말로 사랑하고 아끼고, 그만큼 그를 아껴주고 인정해주는, 무엇보다 ‘존재 자체’로써 그를 바라봐 주는 가족이 늘 곁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지은이의 말 :::
(밀라노칙령으로) 제국을 지배하던 그리스와 로마의 수많은 신들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기독교의 신이 차지했지요. 그 이후 서양 사람들은 1700년 가까이 단 하나의 신을 압도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숭배해 왔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p8
디아트리베는 설사 심오한 철학적 변론이나 종교적 사상이라 할지라도 고상한 전문용어를 사용해서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피합니다. 그것을 비속하지만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독자나 청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수법이지요. p10
è이 전개 방법은 나도 연습해서 꼭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1부.신이란 무엇인가.
그 아래에 선 고매한 추기경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고, 폭군이라고 불리던 교황마저 꼼짝없이 숨을 죽였습니다. p21
신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처럼 백발성성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p22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학자의 자질과 시인의 기질을 동시에 가졌던 빙켈만이 <벨베데레의 아폴론>에 바친 찬사 중 일부입니다. 시적인 글이지요? 독일의 문호 괴테가 “자연은 이 멋진 사람을 창조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며 빙켈만을 칭송한 까닭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p25
과연 신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신과 관련해 여느 것과는 달리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신은 영입니다.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또는 ‘숨결’과 어원이 같아요. p27
따라서 신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신의 본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위엄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p28
의인화된 신의 모습을 우리 의식에서 완전히 제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여기에는 지난 수천 년간 신을 직간접적으로 의인화해서 표현해 온 회화, 조각, 시, 소설, 노랫말 같은 숱한 예술작품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p29
è이래서 매체의 힘이란 강력하다고 이야기하나보다. 문자로만 되어 있는 것들 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것들까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의 뇌에 나도 모르게 세뇌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람이란 항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법입니다. 밀턴의 사려 깊은 경고는 사실상 무시되었고, 그의 탁월한 묘사는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신을 의인화하는데 뚜렷한 공헌을 하고 말았습니다. p31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신은 …… 그리스인들의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지요. p33
르네상스란 ‘재탄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양식이 드러내는 특징이지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몸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그것에 열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p36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p37
그리스인들은 청소년들이 평소 입는 옷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옷이 몸의 발육이나 아름다움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이는 곳이 없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요즘의 비키니처럼 더 많이 노출되도록 디자인했지요.
이 모든 일이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려던 그리스인들의 열망에서 비롯되었지요. p38
è르네상스 시대에 왜 뛰어난 작품들-인간의 신체를 표현한 것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굉장히 소중한 정보이다.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옷 벗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고대나 중세 기독교에서 인간의 육체는 언제나 욕정과 죄의 온상이기 때문에 숨기고 가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p39
미켈란젤로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가진 중세 이탈리아의 예술가였습니다. p40
<에로스의 날개>
그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언급한 ‘이데아의 미’, 곧 우리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열렬히 추구했습니다.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여인의 얼굴이나 신체와 같은 감각적 대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들은 단지 매개체일 뿐이지요. 아름다움은 오직 우리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 상기하게 되는 지고한 신적 형상의 아름다움, 곧 ‘이데아의 미’에서 나옵니다.
에로스는 우리의 영혼을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향하게 하는 ‘혼의 전향’을 가져오고,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을 향한 등정을 하게 하지요.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갯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p45
<신인동형설>
그(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가 자신의 작품들에서 사용한 신에 대한 신인동형적, 신인동감적 의인법을 거세게 비난했습니다. p49
서양 근대철학자나 신학자의 글에서도 ‘운동’이라는 말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변화’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볼까요? p50
하지만 이 둘(형상과 모양) 모두 신의 ‘외적 형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적 본성’을 뜻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이지요. p53
<신론과 존재론 그리고 서양문명>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 받아 존재하지요.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p56
우리가 앞으로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틸리히가 이미 갈파했듯이-이 같은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닌 비유들이 구약과 신약에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p57
단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일 뿐이지요. 신은 영이니까요.
여기에 사용된 ‘떠남’, ‘등돌림’, ‘돌아감’이라는 개념들이 바로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모든 존재물은 존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p59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같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그 관계도 분명치는 않으니까요. ‘알면 믿는다’는 입장도 있고 ‘믿으면 안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p65
2부.신은 존재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바꾸어 놓을 두 가지 중요한 만남을 가졌는데요,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미니크 수도회였습니다.
6세기 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칙령으로 아테네에서 모든 철학 학교를 폐쇄했기 때문이지요. p69
è황제의 권력을 남용 및 악용하는 훌륭한(?) 예시이다. 지금도 사실 별로 다르지 않은 국가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아마 당신도 지금쯤은 눈치 챘겠지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신은 무엇입니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로 신이 어떤 식으로 있지 않은지, 둘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지, 셋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이름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신은 ‘있는 자’ 또는 ‘존재자체’라는 것이지요. p75
1장.존재란 무엇인가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란 일반적으로 개념을 대표하고, 그 사물과 다른 사물을 구별하는 칭호로서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지시해 주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먼저 그것의 ‘이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심지어 사람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까지 그 사람의 ‘무엇’, 곧 본질을 나타내주는 식으로 지었지요.
따라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곧 새로운 신분이나 새로운 삶의 목적을 얻었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p80
è굉장히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름을 바꿔서 새로운 신분이나 새로운 삶의 목적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왠지 사주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그 분을 파악한다면 그 분은 신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있지요.
다시 말하자면, 세상 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p84
우리가 ‘어떤 것’을 예컨대 ‘사과’로 규정하고, 그래서 사과라고 이름 붙이면 그 순간 우리는 동시에 ‘사과가 아닌 것’을 이미 전제한 것입니다. p85
그래서 모세가 어렵게 알아낸 신의 이름이 ‘야훼’지요.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존재’입니다. p86
<지성도 넘고 신비도 넘어>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 개념을 통해 신의 무한성을 처음으로 규정한 철학자인 것입니다.
이것을 형이상학으로 끌어올려 ‘존재’라고 이름 붙인 사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는 비물질적 무한자이자 유일자였지요. p87
모든 이데아의 근거인 ‘일자’ 또는 ‘선자체’로 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었고요. 그 체계를 종교화한 사람이 플로티노스였습니다. p88
요컨대 신은 이 말을 통해 자신이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임을 알린 것이지요. p94
신이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p99
인간과는 전혀 달라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p101
<그리스인들과 존재>
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인들은 ‘세상 모든 존재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p104
파르메니데스의 이분법적 사고는 존재론만이 아니라 인식론과 논리학의 터전을 닦은 ‘시원적 사유’였습니다. p106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오직 ‘참’과 ‘거짓’만을 인정하는 이치 논리인 것도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p107
그리스 철학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이 가진 이분법적 경직성과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가진 탁월함 덕분이었습니다. p113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우주만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p114
<자연의 사다리에서 존재의 사다리로>
이미지->사물->수학적->이데아의 순서로 올라갈수록 더 변함이 없고 완전하며 단일하지요. 따라서 이들 각각에 대한 지식도 예술->자연과학->수학->철학의 순서로 올라갈수록 더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p116
이미지->사물->수학적 대상->이데아로 올라갈수록 질적인 면은 점점 좋아지지만 양적으로는 점점 적어진다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p117
고대와 중세의 사람들에게 피라미드식 존재의 계층구조는 단순히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 체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엄격한 가치체계이기도 했습니다. 플로티노스가 플라톤을 따라 존재의 체계를 가치의 체계로 가르쳤기 때문이지요. p122
피조물은 선함, 평안함, 지혜, 즐거움이라는 측면에서 부족하지만, 신은 그 모든 것에서 정점이라는 말이지요. p123
<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사회적 계층구조로>
자연과 사회 안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가 신이 정한 진리라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이 사회적 계층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이지요. p127
왜 개미가 공작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만일 평등이 어느 곳에서나 요구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 대해, 시종은 주인에 대해 평등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 할 것이다. p127
è개미와 공작.. 조건 자체가 전혀 다른데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 덕분에 여성의 지위도 합리화될 수 있었던 같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대연쇄’가 한결같이 불평등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무기로만 해석된 것은 아니에요. 특히 근대에 들어서면서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평등이나 존엄을 옹호하는 기반으로도 인식하기 시작했지요. p129
<존재는 창조주다>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일자로부터 누스(nous), 즉 ‘정신’이 맨 먼저 유출됩니다. p133
이때 말하는 제한성, 규정성이라는 ‘안정된 조건’이 철학에서 말하는 ‘본질’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p135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정신이 ‘창조주’이기는 해도 다만 ‘창조의 틀’로만 작용할 뿐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은 영혼이합니다.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 무엇을 생산해 내는 매우 특별한 방식을 취합니다.
영혼은 정신(nous) 안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idea)들이 무질 안에서 가시적 형태로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p136
“자신의 빛[형상]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들에게 비추고 있소”
여기에서 “거울에 비추듯이”라는 표현을 보세요. 그게 바로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영혼의 ‘성찰’, 곧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영혼의 작용입니다. p138
주의 깊은 관찰자는 <최고 신>으로부터 사물의 맨 나중 부스러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각 부분의 연결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호메로스의 황금사슬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신>이 명령하여 천상에서 지상까지 늘어뜨린 것이다. p140
‘사슬’과 ‘거울’이라는 표현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서양문명 안에서 매우 소중히 간직되어 온 ‘관념적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p141
<히브리인들과 존재>
보만에 의하면, 그리스 언어가 정지적인 데 반해 히브리 언어는 역동적 성격을 갖고 있지요. p144
당신이 정직한 인격을 가지려면 지속적으로 정직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p148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미술>
그리스인들이 공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에 비해 히브리인들은 시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p150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다시 말해 어떤 것(사과)을 그것(사과)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p157
è창조가 이런 의미라면 왠지 예술도 가까이 다가가 쉽게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림그리기만 봐도,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기는데, 내가 알고 있는 기존의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새롭게 부여하는 작업이 된다면, 왠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존재의 바다와 ‘퍼텐셜’>
그것은 언제든지 물질로 현실화될 가능성이나 경향성을 가졌으므로, 어쨌든 유물론적입니다.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오해 없는 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용어들의 조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p163
그(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장소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신이 ‘어디에나’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또한 신이 모든 시간 안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항상’ 있다고 표현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지요. p165
<신의 모습 상상하기>
‘겨우 비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비유를 통해서’ 신에 대해 상상하고 말할 수 밖에 없지요.
존재의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관한 가르침들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p170
우리는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선 신이 암암리에 사람처럼 생겼으리라는 끈질긴 망상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 바다가 그 자신은 무형이지만 모든 유형적 존재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형체가 없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교설을 이해할 수도 있지요. p171
2장.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나>
실존의 어의만으로 보면 ‘실제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이후 하이데거, 야스피스, 샤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 있게 산다’라는 특별한 의미로 간략해서 사용했습니다.
기획투사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이고, ‘앙가주망은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합니다. p178
안셀무스의 말을 보통 “그 이상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 또는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해석하지요. p180
그가 내놓은 비판의 핵심은 우리의 정신에 존재하는 관념이 무엇이든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이는 700년쯤 후에 칸트가 데카르트를 반박하며 그대로 되뇐 내용이기도 한데요. p182
이런 명제를 라이프니츠는 ‘이성적 진리’, 흄은 ‘관념들의 관계에 관한 명제’, 칸트는 ‘분석판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같은 명제를 라이프니츠는 ‘사실적 진리’, 흄은 ‘사실의 문제에 관한 명제’, 칸트는 ‘종합판단’이라고 불렀지요. p186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
<페일리의 시계를 망가뜨린 사람들>
‘지적 설계론’이라고 부르는 이 주장의 현대적 표현은 “오존층의 두께가 생물 보호에 어쩌면 그리 적합한가? 이는 오직 신의 설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들에서도찾아볼 수 있습니다. p196
유비추론이란 사물이나 사건의 유사성을 근거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입니다. p199
적절한 예 하나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교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p201
오존층이 누군가에 의해 생물들에게 적합한 두께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오존층의 두께에 적응한 생물들만 살아남은 것이라고! p202
허수아비 논증이란 상대방의 주장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형식의 논증인데, 그 내용을 불문하고 논리적 오류에 속하지요. p206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즉 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일(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p212
논증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을 통해 최초로 체계화된 만큼 본디부터 그리스 철학의 산물이자 특성이었으니까요. p217
진리는 타당할 뿐 아니라 건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p218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나>
히브리인들에게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건 논증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어요. p220
우리는 딱딱한 신학 이론이나 따분한 설교보다는 생생한 종교적 경험을 원합니다. p222
그러한 시각적 변형을 숱하게 거친 다음에야 학생은 과학자 세계의 일원이 되어 과학자가 보는 것을 보고 과학자가 반응하듯이 반응하게 된다. p229
그렇다면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30
<메타노이아-신비적 형태에서 일상적 형태로>
종교적 경험에 관해 우리가 간직해야 할 교훈은 그것의 ‘신비적 형태’가 ‘일상적 형태’로 이어질 수 있으며, 또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응하는 신약성서의 용어가 ‘메타노이아’입니다. 어의적으로는 ‘나중에 생각을 바꿈’, ‘달리 생각함’, ‘정신적 가치 지향을 변화시킴’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지만, 기독교 용어로는 이전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의미에서 ‘회개’나 ‘회심’이라고 번역하지요. p232
3부.신은 창조주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아우그스티누스)가 마치 암호와도 같은 텍스트들 안에서 신에 매우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지요. p241
3장.창조론이 왜 <고백론> 안에 있나
뼈가 빠지게 일해 교육비를 댄 아버지 덕에 농사꾼이 아닌 학자가 될 수 있었고, 눈물이 마를 날 없이 기도한 어머니 덕에 젊은 날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p245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칭찬을 받지 못할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è아우구스티누스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영탄했듯이 “통에 채워진 첫 번째 포도주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통에서 그 향기를 풍기는 법”이니까요. p246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 다시 말해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성공적으로 절충하고 통합한 사람이었으니까요. p248
그가 알아낸 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단지 몇 마디만” 바꾸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p258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을 위해 이성을, 신학을 위해 철학을 부단히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p260
<고백인가, 증언인가>
그는 먼저 자신이 진실로 불경건하고 이교도적이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현재가 어떤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준비되었는가를 독자들에게 알립니다. p264
아우구스티누스는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 어머니 모니카마저 그를 말리지 못했습니다. p265
è매 순간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니. 왠지 멋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모두가 당신에게 구할 일이요, 당신 안에서 찾아야 할 일이며, 당신만을 두들겨야 할 일이오니, 이렇게 하는 데서만 받을 것이고 찾을 것이고 열릴 것입니다.” p266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우주의 역사 또한 어떤 우연이나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도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것이지요. p268
4장.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태초는 언제인가?>
그는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p275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
<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고?>
이러한 생각을 과학자들은 ‘인본 원리’라고 부르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지적 설계론’이라고 합니다. 또 신학자들은 – 2부 <신은 존재다>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이런 주장을 논증형식으로 표현해서 신의 존재증명 가운데 ‘목적론적 증명’이라고 부르지요. p292
<앨런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살 수만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려 사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나 죽은 후에도 다시 살게 하는 것이 신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p300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 라고도 주장했습니다.
같은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p303
새로운 언어를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면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유연해진 겁니다. p307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과 상호이해>
내 생각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러지 않은 채 성급히 어떤 일치나 합의를 끌어낼 목적으로 하는 소통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되거나, 획일화를 위한 강제를 유발하기 때문이지요. p311
<영원이란 무엇인가>
만일 공간과 시간이 빅뱅에 의해서 발생하고 블랙홀들에서 소멸하는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공간과 시간 속 사물들의 질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p318
영원 안에 있는 창조가 시간 안에서 작동하면서 순차적으로 역사가 발생하지요. p321
<시간이란 무엇인가>
공간이 연장을 재는 척도이듯 시간이란 지속을 재는 척도이며, 그러한 시간을 파악하는 주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p326
네(시간)가 맡은 일은 원수에 대한 증오심을 없애고,
세평에서 생기는 오해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p328
<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p331
‘이전’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이후’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지요. p333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p334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매 순간이 그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책임을 부여합니다. p335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이지요. ‘분산되는 시간’과 ‘통일된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p336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 마음이 심리적 시간, 존재의 시간, 신적인 시간을 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p337
당신의 마음이 물리적 시간을 살아간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신은 매 순간 크고 작은 이익을 포기하고 욕정을 억누르면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p338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와 프루스트의 ‘회상’>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을 합니다. p342
희망이 생긴 것이고 결국 그의 삶이 구원받게 된 것이지요.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p343
시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으로 보이고 신에게는 시작과 종말이 고정된 영원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매순간 인식되지만, 신에게는 그 모든 일이 단번에 파악되지요. p345
<천지란 무엇인가>
‘무’는 아니지만 ‘무’에 가까운 것, 형상을 가진 물질과 무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p352
<무로부터의 창조>
“이 도살자를 무서워하지 말고 네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죽음을 달게 받아라. 그러면 주의 자비로 내가 너를 너의 형들과 함께 다시 맞게 될 것이다” p362
신은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물질세계에 대해 ‘절대적 독립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그는 부활을 선물할 수 있는 ‘전능한 자’다. 그러니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p363
<보시기에 좋았더라>
한마디로 창조는 그 근거와 결과가 모두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었지요. p367
인간과 세계가 불온전하게 될 가능성, 곧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이유는 그것들이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나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p371
<창조의 여섯 날이 글자 그대로 ‘6일’인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여섯 날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6일과는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p377
<말에서 육신으로, 진리에서 행위로>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장면이 없습니다. 예수는 인간으로 세상에 온 시이어서 태초부터 이미 신성하기 때문이지요. p380
주로 ‘이성적으로 밝힌다’는 의미지요. 그런데 다바르의 어원적 의미는 ‘뒤에 있는 것을 앞으로 내몰다’, ‘대화하다’입니다. 주로 사물의 근원을 드러내고 말의 배경이나 숨은 의미를 알게 한다는 뜻이지요. p385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p388
5장.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풍부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여?>
창조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역사가 아니고 섭리에 의한 지속적인 보존과 인도라는 의미입니다. p395
한마디로 신은 자기 스스로 충족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의미에서도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p398
인간은 결핍된 탓에 교제와 벗을 원하지만, 신에게는 어떤 결핍도 없기 때문에 누구와의 사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p399
일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이 급기야는 자기 바깥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신은 자애로운 아버지같이 선하므로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모든 좋은 것을 퍼뜨린다는 것이지요. p400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뚜렷한 공통점은 ‘어쩄든’ 신도 창조가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p402
이 말(도킨스의 ‘눈먼 시계’)에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을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다윈이 발견한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선택이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에 따라 진행될 뿐이므로 그것에는 아무런 목적도 예정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p405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다윈의 후계자들은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자연, 사회, 문화 그리고 인간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p407
하나는 내용인데, <종의 기원>이 내포하는 유물론적, 실증주의적 경향이 당시 지식인들의 취향과 맞았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서술 방식과 관련되는데, 풍부한 사례와 뛰어난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한 다윈의 표현 기법이 대중을 매혹시키는 데 충분했다는 점입니다.
다윈은 이 야심만만한 저서를 서술하면서 ‘내 주장이 이렇다-즉 모든 생물은 진화한다’는 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대전제로 세워 두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 ‘연역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p413
여기서 당신이 주목할 용어는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이에요. p415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씨 뿌리는 자와 수확하는 자가 항상 같으리라는 법은 없는 겁니다. p420
è완전 공감된다.
19세기 후반은 유럽만이 아니라 북미 대륙에서도 사회다윈주의가 그 위세를 맹렬히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서양 문명 전반에 걸쳐 개인주의자들은 무자비한 방임을, 자유주의자들은 무제한 경쟁을 요구했고, 우생학자들은 동적 내의 신체적, 장신적, 경제적 약자들의 합법적 제거를 부르짖었으며, 인종주의자들은 자국 내의 열등한 인종이나 외국인 추방을 외쳤고,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대륙을 미개지로 몰아 계몽 또는 선교라는 미명 아래 정복을 감행했습니다. p424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을 따라 인간사회에서도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와 함께 자유,평등,박애를 지향하던 이성과 계몽의 역사가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p425
일부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경쟁의 산물이라는 데 극구 반대했습니다.
이타주의적 해석이 동시대 진화론에서 바진 가장 중요한 요소다 라고 지적했지요.
그렇더라도 좋은 품성을 갖춘 사람이 늘어나고 도덕성의 기준이 진보할수록 부족 전체는 다른 부족에 비해 막대한 이익을 djerp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p426
진화의 더 나은 조건은 협동에 의한 경쟁 소멸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사회다윈주의자들은 모두 냉혈한, 악당, 무식쟁이 또는 사회파괴자였던 걸까요? 아니지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요. 그들은 당시를 대표하는 과학자거나 지식인이었고, 무엇보다 계몽주의자였어요. 당연히 그들은 이상사회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è시작은 그러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입맛에 맞게 해석해서 다윈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이 생겼나보다. 기독교에서도 자기들 입맛에 썼다니, 놀랍지 않은가.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의 본질이 무사유라고 설파했지요. 무사유는 일반적으로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하지만, 그녀는 이 단어를-보다 실천적 의미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또는 거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홉 하우스)는 진정한 자유는 그 안에 평등 개념을 포함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홉하우스는 “나는 자유가 만병통치약이라거나, 자유의 관념이 참다운 사회철학이 기초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는 사회적 삶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상호부조가 상호방임보다 덜 중요하지도 않으며, 집단행동의 이론이 개인 자유의 이론보다 덜 기본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p428
<다윈과 기독교>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진화한 그 새로운 인간이 바로 ‘초인’이지요. p432
19세기의 유럽인들도 나날이 발전하는 산업과 과학을 통해 현세에서는 물질적 삶을 충분히 즐기고,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종교생활을 통해 내세에서는 영원한 삶을 얻으면 그만이라는 세속적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평생 온몸으로 저항하며 싸웠던 것이 바로 그러한 세속주의였지요. p435
그는 인간은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가 될 수 있다고 대답했지요. p438
그들의 속내는 해외 선교에 있었습니다. 대부분 진화론자이거나 사회진화론자이던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제3세계 선교에 나서려는 것이었지요. p440
진화론이 기독교 신학과 하등의 갈등 없이 완벽하게 조화되는 게 정말로 가능할까요? p441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
호트에 의하면, 진화가 창조의 메커니즘 가운데 일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주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자기조직을 하는 본유적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근거는 무한자인 신의 사랑을 유한자인 우주가 받아들이려면 ‘진화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p444
신은 세계를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계영혼(또는 성령)에게 ‘세계를 현실화하는 질서와 과정’을 부여해 그에 의해 창조가 차례로 일어나게 했다는 말이지요. p449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같이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종자적 형상을 실제 형태로 현실화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자연법’이지요. p451
사물에 대한 실제적 주권자인 신 안에 존재하는 통치 개념이 자연법이다. p453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p454
기독교 신학은 큰 틀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일 이론적 바탕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p456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은 문제>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 가운데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논란이 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그것들이 지닌 경이로운 복잡성, 정밀성은 ‘태초의 6일’이라는 어느 특정 시기에 일회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자연이 오랜 세월 동안 부단히 진화한 결과라는 주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화가 어떤 외부적 원인이 설계한 특별한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자체 매커니즘에 의해 ‘자발적’이고 ‘맹목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p458
칼빈은 성서에 나타난 계신는 신이 ……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맞게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교훈했지요.
기독교 신학은 항상 성서에 근거해야 하지만, 그것은-마치 역사학이 그렇듯이-언제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해석, 재정립되기 대문이에요. p461
<눈뜬 시계공과 눈뜬 하나님 문제>
이 말에는 신의 예지와 무관하게 에보디우스 자신은 행복을 원할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같은 주장을 양립주의라고 규정합니다. 양립주의란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의 예지와 상충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의 주장들을 말하지요. p468
설령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의 행동의 자유롭다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p469
강제하는 자는 모든 것-경우에 따라서는 강제할 수도 강제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모든 게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강제 당하는 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한정된 상황’ 아래서는 양립주의가 문제없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p470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
이러한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하지요. 우리는 뱁새나 개미와-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무엇보다 지능적으로- 전혀 다른 범주와 차원에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p473
신과 인간의 인식은 판단의 범주와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p474
우연성(맹목적성)은 제2원인의 속성이고 필연성(합목적성)은 제1원인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제2원인과 제1원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이 합목적적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연이 맹목적으로 진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p477
로버트 존 러셀, 우연성(맹목적성)은 일반섭리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속성이고 필연성(합목적성)은 특별섭리의 차원에서 표출되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p478
<창조의 목적은 구원>
이같이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이유에서-다시 말해 우리가 창조의 나쁜 신과 구속의 좋은 신을 갖지 않기 위해, 그리하여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지 않기 위해-창조의 신과 구속의 신은 하나여야 하고 창조의 목적이 곧 구속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p484
4부.신은 인격적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위협을 느낀 네로는 소문을 막기 위해 일석이조의 비상한 수단을 강구했습니다. 골칫거리였던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모는 것이었지요. p490
6장.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세네카의 ‘운명>
세네카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친구들을 오히려 꾸짖었답니다. p497
평소 그는 친구들에게 인간의 삶을 연회에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직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제 그가 연회를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p498
몽테스키외 : 법이란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사물의 본성에서 도출되는 필연적 관계를 말한다. 개개의 이성적 존재는 그들이 만든 법을 갖고 있을 테지만, 그들이 만들지 않은 법도 갖고 있다. p501
서양인들은 근원적으로 자연법은 ‘정당하기 때문에 법’이고, 실정법은 ‘명령되었기 때문에 법’이라고 생각해 왔지요.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이었지요.
세네카는 <섭리에 대하여>에서
“선한 사람이 할 일이 무엇이겠소? 자신을 운명에 맡기는 것이오. 우리가 우주와 함께 휩쓸려 간다는 것은 그나마 큰 위안이오. p502
세네카는 이처럼 강압적인 섭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는 인간의 자기희생과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는 섭리를 따르는 일이 때때로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용기를 내서 참고 견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만사는 우리 생각처럼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용감하게 참고 견뎌야 하오. p503
<바울의 ‘애정’>
세네카가 말하는 섭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치 자연법칙처럼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칙일뿐 우리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소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와 달리 바울이 말하는 섭리의 근원은 당연히 구약성서의 계시입니다. p516
세네카의 신은 비인격적이고 바울의 신은 인격적이라는 말이지요. p517
<칼빈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를 논할 때, …… 오히려 모든 사건에 대처하려고 키를 잡은 배의 선장과 같은 분이다. p518
그가 공부한 신학과 법학은 훗날 훌륭한 라틴어 사용자가 될 어학적 기량과 논쟁에서 많은 적을 물리칠 만한 수사학적 기반을 닦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p519
세네카가 ‘운명’이라고도 부른 스토아 철학적 섭리는 그야말로 우주적 보편성을 갖고 있어서 어떤 것이든 그 직접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기 때문이지요. p523
칼빈에게 중요한 일들은 평생 동안 정작 자신의 의지와는 별 관계가 없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칼빈 자신이 그 모든 일을 수치스럽거나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p527
신에 관한 직접적 경험 없이는, 비록 신을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종교적으로 신앙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철학자의 신과 종교인의 신, 아테네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이 판이하게 갈라서는 분기점이지요. p528
<아테네의 신>
<눈얼음 계곡 건너기>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p543
<예루살렘의 신>
예수를 통해 신의 인격성이 강화된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공동체성의 강조’가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었기 때문 p549
7장.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p559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선한 목적과 의도에서 나온 강제는 오히려 그 인격성을 강화해 줄 수도 있음을 보여주지요. p561
바울은 신의 섭리가 때로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지요. 하지만 그는 고통의 배후에는 언제나 신의 선한 ‘목적’과 ‘뜻’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p563
<강한 섭리, 약한 섭리>
아,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우리의 가련한 바람은 이토록 끈질깁니다.! p570
<기도는 왜 하는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섭리로 확인하는 일은 기독교인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p575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는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바로 이것이 관건입니다. p576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통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일체를 자신의 선택에 의존하지요. p586
키르케고르의 말대로 윤리는 “주인공의 허약한 어깨에 거대한 책임을” 지웁니다. p591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뉘우침이란 본디 최고의 윤리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입니다. p593
<두려움과 떨림>
이 ‘이해할 수 없음’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들어 있습니다. p596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날 그 산에서 정작 아브라함이 불태워 신에게 바친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한 마리 숫양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불안과 불신이었지요. p604
키르케고르에게 종교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p608
5부.신은 유일자다
8장.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일자>
플라톤이 일자를 선자체로 규정한 일은 서양문명사에서 하나의 위대한 사건입니다. p633
한마디로 신은 악한 게 아니라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마음 편히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바로 이것이 플라톤이 서양 사람들에게 준 위대한 선물입니다. p634
<플라티노스의 일자>
플라톤이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였다면 플로티노스는 깊은 철학적 통찰력을 지닌 종교인이었습니다. p639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테르톨리아누스의 용어들>
테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페르소나’는 바깥으로 나타나는 신의 지위, 곧 성부.성자.성령을 의미합니다. p658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오리게네스는 평생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내일 일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어요. p664
è소크라테스랑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었나보다.
플라톤주의 사상들의 공통 특징은 플라톤 사상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과 요구들을 대폭 수용한 탓에 신비주의 경향을 띤다는 것이지요. p669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 논쟁>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기독교 신학에서 삼위일체론만큼 기본이 되는 교리도, 해석하기 어려운 교리도 없습니다. p691
말년에 아타나시우스는 이 같은 혼란을 정리할 전문용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했지만 끝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p696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이런 말이 나오지요. “분명한 말을 써야겠어. 어정쩡한 말을 쓰다간 봉변당하겠는걸!”
삼위일체 논쟁 당시 신학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p697
이러한 극심한 언어적 혼란 때문에 당시 동방교회 사람들에게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삼위일체 정식이 어떤 형태의 그리스어로 표현되더라도 삼신론과 단일신론 사이에서 혼란만 가중시킬 뿐 그 의미는 여전히 분명치 않았던 겁니다. p702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이’ 하나이고 누가 먼저 존재하고 누가 나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관계적으로만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p712
<삼위일체가 진정 의미하는 것>
이 사랑은 또한 본질적 존재다. 하나님이 본질적 존재시며, 성경 기록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p719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일을 한 겁니다. p720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그가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이것이 중요한데- 성부.성자.성령이 가진 통일성은 동일한 것이 모여 있는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 있는 ‘공동체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p724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넘어서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까지 받아들이고 포괄하는 ‘이종사랑’이라는 겁니다. p725
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공동체를 마침내 이루어 내는 사랑이지요. p726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를 위하여 조문할 사람들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기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단일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성이 단일성으로, 단일성이 삼위성으로 축소되는 일 없이 결합한” 통일성입니다. p731
9장.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의 신’이냐, ‘신약의 신’이냐>
적게 생각하는 자는 쉽게 말한다.(중세 격언) p738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p741
최선의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 p742
<유일신이 왜 질투하나>
원시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신론의 형태는 그리스 신화가 그럿듯 다신론이 보편적입니다. p744
유일신에 대한 다신론적 표현은 신이 실제로 여럿이어서가 아니라 고대 히브리인들이 신을 여럿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p745
릴케가 말하는 신의 나라와 법칙의 성숙이 역사 안에서 인간에 의해 이해되는 신의 성숙일 뿐입니다. p750
<아브라함은 구원받았는가>
유스티누스는 집안이 부유해서 평생 경제적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p757
따라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등장하는 ‘나’는 당연히 ‘성재적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유스티누스의 생각이었습니다. p765
유스티누스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은 다 악마에 불과하다면서 누구보다 강력하게 유일신론을 주장하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선재적 그리스도론을 통해 예수와 복음을 몰랐던 유대교인들이나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포용성을 보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유일신의 종교인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과 폭력성을 실천적으로 극복한 고대적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p769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틸리히 :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으로 인한 배타성의 초월을 강력히 주장하는 내용이 있지요. p771
틸리히는 존재자체, 곧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객체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라고 강조했지요.
이 말은 결국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함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뜻입니다. p775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
세계는 매우 불안하고 아주 불공평하며 전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는 위험이 국민국가적 차원으로는 극복되지 못해 곧바로 전 지구적 재앙으로 확산됩니다. p779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소화하는 것들과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에도 공포가 숨어 있지요.
이제 우리는 불안과 공포마저 세계화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아닌가요? p780
인간은 어떤 문명에 살고 있건 간에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p781
두말할 나위 없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이해와 교회의 전향적 선포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p783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신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아낀다는 사실이지요.
미켈란젤로가 남겨놓은 메시지는 “ 신의 뜻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와 교인들아! 너희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신의 가혹한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밝혔듯이 신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끼기 때문이다.” p790
이 그림(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미노스와 미다스를 결합한 악마의 얼굴로 묘사된 체세나 추기경)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깔깔대고 웃었지만 체세나 추기경은 교황 앞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벽화에서 지워달라고 울고불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바오로 3세는 “내 아들아, 주님은 나에게 하늘과 땅을 다스릴 열쇠만 주셨다. 지옥에서 나오고 싶다면 미켈란젤로에게 가서 말해라”라며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è바오로 3세는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었나보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이 사실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나 이기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이지요. p798
우리가 이 같은 자기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렸을 겁니다. p799
삼위일체성은 사랑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입니다. p800
::: 맺음말 :::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신을 그와 관련된 문학.역사.철학.과학.예술 등과 연계해서 살펴봤습니다.
근대 이후 서양문명은 애석하게도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고 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최고의 가치를 대체하고 마냥 승승장구하리라고 믿었던 세속적 가치(이성, 개인의 행복, 사회진보, 민중해방, 인본주의)들도 함께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p803
자기희생과 헌신을 이끌어 내서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 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킬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 버렸지요.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 p806
지금은 사냥꾼의 시대지요.
그의 임무는 단지 살아남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세계는 점점 지옥이 되어 갑니다.
바우만은 세계가 이처럼 지옥이 된 원인이 “정원사가 사냥꾼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파하고 그것을 되돌릴 것을 촉구했습니다. p807
근대를 지나면서, 우리는 훌륭한 정원사가 결코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p808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가 첫째 ‘신 사랑’과 셋째 ‘이웃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p809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찾는 일은 이 책이 설정한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에 다음 책으로 미루고자 합니다. p810
è다음 책이 몹시 기대된다. 빨리 읽어보고 싶다.
3.내가 저자라면
(1)읽으면서 좋았던 부분
-줄 간격이 넓고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책이 빨리 읽혔다. 아마 디아트리베 수사법을 사용해 전문적인 용어들을 일상적인 용어들로 대체한 덕분인 것 같다.
-다양한 ‘예시’의 사용으로 이해가 한결 쉬워졌다.
-각 부의 처음은 항상 이야기로 시작된다. 특히 어떤 한 사람의 일화로 시작을 하는 경우, ‘그’라는 대명사로 모든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궁금증을 유발하고, 이야기의 마지막에 누구인지 얘기한다. 책을 읽으면서 찾을 수 있는 소소한 재미를 준다.
-한 가지 이슈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진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정래해 주어서 좋았다. <철학이야기>, <서양철학사>를 읽는 내내 이렇게 정리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철학자간에 서로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설명해주어서 철학자들의 사상의 연결고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주석이 굉장히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본문 중간중간에 ‘정리하겠습니다’ 는 등으로 각 장의 끝에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해주니 이해하기 편하다.
(2)읽으면서 아쉬웠던 부분
-정말 철학책에 비해 정말 쉽게 쓰여지긴 했으나 여전히 철학은 어렵다. 전문용어를 최대한 배제하면서 쓰긴 했지만, 전문지식에 대한 부분은 읽으면서도 무슨 내용인지-당연한 것이지만- 모르겠다.
-신과 관련해 철학을 위주로 하여 과학, 문학, 예술 등과 연계해서 적었다. 예술과 관련한 내용들이 조금 적은 감이 없지 않아 약간 아쉽다.
(3)내가 저자라면
신이란 키워드로 책이 전개 되고 있다. 그래서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에서는 신의 모습을 각종 예술 작품들을 대비하여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신’ 에 대한 편견을 깨 주고 있다. 그리고 2부 신은 존재다 에서는 신이 불리는 여러가지 이름이 나오게 된 경위를 얘기하고, 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3부 신은 창조주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영원, 시간 창조 등의 키워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4부 신은 인격적이다에서는 신은 과연 선한가 악한가, 기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할 수 있는 내용들을 얘기하고 있다.5부 신은 유일자에서는 ‘유일신’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푸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각 장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신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런데 두번 읽고 나서도 각각의 메시지는 이해가 잘 되는데, 왠지 전체적으로 연결이 잘 안된다. 맺음말에서도 밝혔듯이, 저자는 ‘신’을 철학뿐만이 아니라 과학, 문학, 예술 등과 연계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존재로서, 창조주로서, 인격자로서, 유일자로서의 신 이야기를 들려준다. 큰 틀을 가져가되, 세부 항목에서 그와 관련된 카테고리들을 과학, 문학, 예술, 철학으로 분류하고, 그 안에서 다시 지금과 같은 세부 카테고리들로 나누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들이 현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라면, 카테고리의 하나로 ‘오해와 편견’ 또는-이 제목이 너무 세서, 비난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면- 다른 용어, 예를 들면 ‘다시보기’, ‘뒤집어 보기’ 등-식상한 단어들 밖에 생각이 안난다.;;; -의 카테고리도 하나 있어서 그와 관련된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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