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매니아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정의하는 ‘매니아’는 ‘무엇 하나가 좋아지면 밤낮으로 그것에만 매달리다가 결국 그것에 대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음악이든 작가든 아이돌이든 어떤 한 분야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정말 소소한 것까지 거침없이 술술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엄청 부러웠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 머리 속에 도대체 뭐가 들었나?’란 생각이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데,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저런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던건지,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얄팍한 지식밖에 없는 건지. 이유를 찾다 보니 ‘태어나서 한번도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 본적도, 한가지를 꾸준히 오래 해본 적도 없다’는 결론이 났다.
나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영어회화, 수학, 한자, 수영 등의 조기교육을 받았던 어린 시절부터 정규과정인 초중고를 거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누가 보더라도 진짜 열심히 해서 ‘니가 정말 최고다’란 소리를 들을 정도의 지식이나 경험은 어느 것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도 상대방이 조금만 깊이 있는 질문을 하면 더 이상 할 말을 잃어 버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또는 화제전환.
그래도 그 중에서 꽤 오랜 시간 집중했던 것을 찾아보자면 수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초까지 한번의 슬럼프도 없이 꾸준히 했다. 그래서 수영의 꽃이라는 ‘접영’까지 섭렵하고, 소위 ‘날아다니는’ 수준까지 갔다. 물론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시점과 중학생이라는 신분이 겹치면서 더 이상 수영을 하지 않게 되고, 이후에는 10년 넘게 수영장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전쯤 처음으로 수영장에 갔다. 물론 너무 오랜 시간 수영장과 멀리해서 몸이 예전 같지는 않았다. 접영? 물론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예전만큼의 흥미를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꾸준히 관심이 있었던 다른 하나는 여성주의였다. 대학 시절, 우연히 여성주의를 접했고 여성운동을 하면서 많은 여성주의서적을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다. 각종 여성주의 행사들에 참여하고 비영리단체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꽤 많은 양의 여성주의 지식을 습득했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에 워낙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여성주의 관련 대화마저도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지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그럴 때면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지금껏 그나마 열심히 했던 공부 중에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3년전 친구를 통해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 우연히 함께하게 됐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들과 친해지고 가끔 모임의 번개에 참석을 했었다. 하지만 ‘예술이나 문화’와 너무나 멀게 살아온 나로서는 번개모임에서는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모르는 영화나 음악이 한둘이면 그것 외의 다른 대화라도 끼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임에서 나누는 대화 중에 내가 끼어들수 있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물론 여성영화제를 하는 기간에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영화를 함께 보고 얘기를 나누는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 이 모임을 통해 락페스티발이나,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에 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왠지 가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지 않았다. 그런 행사에 참여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가고 모임의 성격에 맞는 다른 사람들과 나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나도 저렇게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서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 꽤 부러웠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간 수많은 영화와 음악을 즐겨온 시간들을 뛰어넘을, 아니 근처라도 갈 자신이 없었다. ‘이건 뭐.. 1년 내내 영화만 보고 음악만 들어도 힘든 분량이야.’ 이런 생각이 들면서 미리 포기해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모임 사람들 중 1-2명만 개인적으로 만날 뿐 공식적인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다. 가서 굳이 나의 얕은 지식을 확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포기가 빠른 편이다. 마음먹은 일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생기거나, 시작하기도 전에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가능할 것 같지 않으면 미리 포기해버린다. 나는 왜 이럴까? 어떤 것에 흥미를 쉽게 가지게 되면 그만큼 쉽게 싫증을 느끼는 것 같다. 아니면 흥미를 느끼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경우에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시간을 견뎌본 적이 없으니 힘든 시간이 지난 후에 내가 느끼게 될 ‘희열’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끝까지 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던 중 <<신화의 힘>>이란 책에서 이 구절을 찾았다. 그리고 내 머리 속이 환해졌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p190
‘아… 그래.!! 바로 저거야!!!’
얼마 전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히가시노 게이고-영화 '백야행' 원작을 쓴 일본의 대표 추리소설작가-’라는 일본 작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물론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의 작가였다. 이 친구는 히가시노의 책을 우연히 읽게 된 후, 이 작가가 쓴 책을 몽땅 사서 일주일 동안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해서 다 읽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최고의 작가라고 극찬을 하며 내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을 했다. 한참을 지나 서점에 갔다가 제목이 맘에 들어서 잡은 책이 히가시노의 책이었다. 그리고 너무 흥미진진하고 탄탄한 스토리덕분에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역시 추천할만한 책이었고, 책을 읽은 후에야 친구가 왜 그렇게 이 작가에게 열광했는지 이해가 됐다. 히가시노라는 작가는 주제에 대해 공부와 자료조사를 엄청나게 한 후에 책을 쓴다고 들었다. 내가 읽었던 책은 국가대표급 운동선수들 사이의 이야기를 쓴 것이었는데, 그것도 한 자리에서 다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운동선수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운동선수경험이 있어야만 알것 같은 운동선수의 세심한 심리묘사와 운동선수들이 처해있는 환경과 거기에서 생길 수 있는 갈등표현과 긴장감 넘치고 빠른 전개-책을 보고 있지만, 마치 영화를 보는듯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반전 때문이었다. 사실 친구가 히가시노의 책을 전부 사고 일주일만에 다 읽었다는 얘기와 히가시노 감독이 글을 쓰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공부와 조사 하는지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참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하나에 빠지면 무섭게 빠져드는구나’. 그리고 나도 한번 그렇게 한번 빠져들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이렇게 항상 생각만하고 있는 나를, 시작하기도 전에 겁먹고 포기해 버리는 나를 죽이고 싶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나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나에게 지금 새로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매니아’가 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매니아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주변이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나에 완전히 빠져들고 싶다. 계속 파고들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뜬눈으로 밤을 새도 전혀 피곤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집중할 수 있는 ‘그것’을 만나고 싶다. ‘그것’을 만나는 순간 금방 싫증 내고 포기했던 지금까지의 나를 버리고, 꾸준히 하나에만 매달릴 수 있는 나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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