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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칼럼

화려한 비판론자를 꿈꾸다.

by 신치 2011. 7. 4.

비판을 잘하고 싶었다. 대학교 3학년, 총여학생회를 함께 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 중에는 철학을 전공하거나 복수전공 하고 있던 친구가 있었고, 이미 여성주의를 접한지 몇 년 되고 어느 정도 공부를 했던 친구 그리고 여성주의를 이제 막 접하고 걸음마를 시작했고, 비판적인 사고와는 전혀 상관없이 주입식 교육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서, 듣고 보고, 읽는 것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던 내가 있었다. 함께 세미나를 꾸준히 진행했었다. 여성주의 관련 서적을 읽고 각자 맡은 부분을 발제하고, 함께 논의 해 볼 문제들을 가지고 오는 형식으로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여성주의적 시각을 접목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찾아내는 것, 친구들의 생각에 대한 나만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또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으로 강 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이리저리 쓸려 다니기 바빴다.

반면 당시에 함께 했던 친구들은 나와 달랐다. ‘왜 그렇게 생각해?’, ‘A라고 하기에는 B라고 생각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C를 고려한다면, A”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등의 이야기들을 참 잘도 했다. 그 때 나는 그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렇게 우리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서, 혹은 우리가 진행하는 세미나를 위해 읽고 있었던 책들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머리 속에 넣은 다음, 그들의 언어로 다시 내 뱉을 수 있는 그녀들의 능력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적 사고를 통해 그녀들의 머리 속에 또 다른 지식들이 채워져 나가는 모습들을 보니,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을 배워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p45)

그렇다. 귀와 눈 등 오감을 통해서 책과 만나고, 영화와 만나고 있었지만 나는 내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와, 책의 저자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해서, 왠지 스스로가 굉장히 작아지고, 쓸모 없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처음 여성주의 세미나를 할 때, 이런 느낌이었다. 마치,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 앞에서 노홍철 같은 사람이 쉴새 없이 한국말로 떠들고 있을 때 외국인이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이랄까? 그렇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세미나를 했고, 책도 읽고, 여러 가지 활동들도 했다. 당시에는 어서 나도 친구들처럼 머리 속을 꽉 채워야지라는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는 무언가가 들어가고 있는 것은 같은데, ‘내가 지금 잘 이해하고 있는 건가?’ 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내 머리 속에 정리되고 있는 수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내 언어로 만들어 내기가 힘들었고, 그것을 가공하는 과정을 거치고, 의문을 거쳐 또 다른 지식으로 연결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여성주의 지식과 정보들을 흡수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활자로 된 정보일 뿐, 나에게 지식으로 쌓이지 않았다. 그것이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까지, ‘나의 언어로 표현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처럼 나 역시 철학이 되어야 했다. 내가 직접보고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것들즉 나의 경험을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 보아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오로지 책에 있는 활자를 세미나 하는 날짜까지 읽어 내려가기 바빴고, 영화도 장면 하나를 보고, 대사 하나를 듣기만 하기에도 바쁜 시간이었다.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우리는 비록 숙련된 기술이 어느 정도 부족하다해도, 악보를 읽는다든가, 연주를 하든가 해서 곡을 재구성해야 한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점차 숙련된 기술도 갖게 된다. (p382)

여성주의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주의 관련 서적과 영상 등을 보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텍스트와 영상에서 배운 것들을 내 삶에 그리고 내 어머니의 삶, 혹은 할머니의 삶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여자들의 삶으로 재구성하고, 대비를 시켜봐야 했다.

그러던 중 학교 자체 여성주의 매체를 발간하기로 했다. 매달 하나의 주제를 정해 함께 글을 쓰고, 수정하는 작업을 통해 매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매체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여성주의를 내 경험 안에서 재구성하기가 조금 쉬워졌던 것 같다. 애써 잊으려고 가슴 한 구석에 보이지 않게 잘 숨겨 두었던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어 다시 생각하고 해석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여성주의라는 것과 결합되어 또 다른 하나의 기억과 경험을 창조해 냈고, 그 기억으로 인해 생겼던 상처를 나의 언어로 된 글이 아물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나의 경험들 뿐만 아니라, 책을 소개하면서, 영화를 소개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감상을 곱씹어 보고 나의 언어로 다시 뱉어내는 연습을 많이 해 볼 수 있었다. 많이 어설프게 시작하긴 했지만, 점점 나는 나의 역사와 나의 언어들을 찾고 점점 늘려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나에겐 무언가 부족함이 느껴졌다. 내가 쓴 글을 다른 친구들과 검토할 때면, 그 글에 대한 의견을 받는 것이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다. 쏟아지는 창조적 비판들을 견디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재구성해서 만들어 낸 글에 대해 자신이 있었더라면, 친구들이 아낌없고 거침없이 해 주는 조언들이 오히려 고마웠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열등감과 채워지지 않고, 더 확장되지 않는 나의 지식들에 대한 허전함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던 것 같다.

회의적이란 말은 그 어떤 만성적 우유부단을 나타내는 통속적인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원래의 그리스어는 단순히 꼼꼼하게 탐구하는 사람 정도의 뜻이다. 체계를 수립한 자가 자기의 해답을 발견했다고 느낀 데 반하여, 회의론자는 그보다 확신이 덜하여 계속해서 고찰했다. 이윽고,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자신 없는 상태가 그들의 이름을 특징짓게 되었다. (p421)

자신의 책을 통해, 자신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과 더불어 스승을 비판했던 플라톤처럼, 역시나 자신이 배웠던 플라톤을 비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자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 어떤 학문에 대해 받아 들일 것은 충분히 받아들이되, 그것들을 종합하고, 소화시킨 후, 그 중에 소화되지 않는 부분들을 다시 뱉어내어 비판을 하고, 이 비판을 통해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시키는 모습이 바로 내가 원하는 ‘화려한 비판론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회의론자였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만을 끊임없이 던졌다. 확신도 자신도 없는 상태는 심지어 내가 느꼈던 과거의 감정들, 지금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까지도 의심하는데 이르렀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이 맞는거야??‘라고 말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점점 힘들게 만들었다.

서양의 철학자들을 만나니 그들은 하나 같이 똑똑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자신의 생각을 꼿꼿하게 세워놓지 못하면 남을 비판할 수 없다.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단단함이 필요하다. 비판을 하기 앞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의 나도 여전히 화려한 비판을 할 수 있을 정도 단단하게 서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우선 원래 그리스어의 의미처럼 ‘단순히 꼼꼼하게 탐구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꼼꼼하게 하나씩 탐구하다보면, 어느 새 나도 ‘화려하게’ 비판할 수 있을만큼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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