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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개인적 단상

신치의 이탈리아 여행

by 신치 2011. 8. 18.

2011신치의 이탈리아 여행

첫 만남, 팔방미인의 도시 밀라노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도시이며,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 강이 도시를 흐르고 있다. 수도 로마 다음으로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경제, 관광, 세계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지이다.

켈틱과 로마시대

기원전 400. 켈트족과 인스부레스족들이 밀라노와 주변 지역에 살았다. 기원전 222년 로마는 밀라노를 점령하여 메디올라눔이라 불렀다. 로마가 점령한지 몇 세기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기원전 293 서로마 제국의 수도로 선포했다. 이 후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거대한 기념비, 임페리얼 궁전 등 대형 건축물들을 지음으로써 밀라노는 서로마 제국의 군사, 행정, 교통,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했다. 313에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고,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그리스도인의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덕분에 종교의 중심지 역할도 하게 되었다. 539, 비잔틴 제국과 동고트족 사이의 전쟁으로 도시의 시설들이 많이 파괴된다.

중세시대

중세 시대동안 밀라노는 풍부한 평원을 기초로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한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를 공격하고, 1162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며 다시 재앙을 겪게 된다. 이를 계기로 지방 도시들간 롬바르디아 동맹이 결정된다. 하지만 로마제국과 동맹간의 전쟁으로 인해 인구와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면서 10년간 전쟁이 지속되었다. 1277 비스콘티 가문의 영주에 의한 도시 통치가 시작되어, 14세기 초부터 15세기 중반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1447년 마지막 공작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면서 비스콘티 가문의 영주정이 끝나게 된다.

영화<레터스 투 줄리엣>의 수많은 로렌초들처럼 챠오~’ 이 한마디만 던지면 알아서 작업을 걸어올 것이라 기대했던 나는 밀라노 공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밀라노 시내를 들어서는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보여야 할 잘생긴 남자들과, 패션의 도시에 걸맞는 패셔니스타들은 없고, 온통 나무에서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낙엽들과 주차된 차들과 자전거 그리고 전철 뿐이었다. 처음에는 일요일이라 그런가보다 했으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틀 전부터 이탈리아는 휴가 중이라는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된다. 결국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만화책에서 막 튀어나온듯한 기대했던 미소년들-본 사람들도 관광객일 가능성이 클 듯-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본 것 같다.



커다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밀라노에서 처음 들른 곳은
스포르체스코성이었다. 이 성은 원래 비스콘티 가문의 성터였으나 1450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문에 의해 영주의 궁전으로 다시 지어졌다. 르네상스 양식 궁전으로 이후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거쳐 화려하고 위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켈란 젤로의 마지막 작품인 대리석상<피에타 론다니니>가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처음 보였던 곳은 스포르차 가문에 의해 뒤늦게 만들어진 성곽이었다. 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넓은 잔디가 보였고, 비스콘티 가문에서 지었던 기존의 성들이 눈에 보였다.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진 않고, 성 곳곳에 주로 비둘기와 고양이들의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옛 성곽을 지나면 또 작은 뜰이 보이는데, 그곳에서 커다란 연회를 할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움직이는 무대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이 뜰 바로 맞은편에 있는 공원을 스포르차 가문의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던 희귀한 동물들을 사들여 세계 최초의 동물원을 만들었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밀라노에서 두 번째 만난 곳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부속 식당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이었다. 15세기 중반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건립한 고딕 양식의 건물이며, 르네상스 건축의 거장인 브라만테가 설계했다.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 예약해 둔 표를 들고 기다리는 중부속식당 요리하는 공간이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바로 뒤쪽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나오는 온갖 것들 덕분에 최후의 만찬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입장. 그림에서만 보아왔던 최후의 만찬 그림이 내 눈앞에 걸려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나도 천재 작가가 된 셈치고, ‘거침없이그들과 마주하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에 최후의 만찬을 보았을 때는, 도대체 왜 이 작품이 그토록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것인지 잘 몰랐다. 워낙 그동안 그림이나 예술 쪽에 관심도 없고, 특히 종교화에 대해서는 더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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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은 유다의 배반이라는 순간을 그린, 당시로서는 최초의 그림 중 하나이다. 다른 최후의 만찬과 달리 배신자인 유다가 홀로 떨어져 있지 않고, 예수가 제자 중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 하자 ‘그것이 저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을 표현했다. 12제자의 각기 다른 심리를 그대로 드러낸 것과 그들 뒤로 펼쳐진 배경의 원근감 있는 묘사가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예술성을 드높이고 있다. 이 벽화에 매료된 괴테는 “예술가(레오나르도)가 고요한 만찬을 흐트러뜨리는 기폭제로 사용한 것은 스승인 예수가 ‘너희 중에 배반자가 있다’고 한 말이다. 이 말이 나온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동요했으며, 예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최후의 만찬>은 수도사들이 식사 중에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성찬의 의미를 묵상하기 위해 그려졌다. 열흘 동안 수많은 성당을 둘러보고, 곳곳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보고 나서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순간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장면과 등장인물들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위와 같은 해석이 나올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최후의 만찬>을 뒤로 하고 들른 곳은 스칼라 극장이었다. 피에르마리니가 설계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이다. 원래는 산타델라 스칼라 성당이 있던 자리였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극장이 세워졌다. 푸치니와 베르디가 첫 공연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극장 부속 건물에 박물관도 있다. 파바로티도 이 곳에서 공연을 하면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고 하니, 이 극장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충분한 상상이 가능했다. 정해진 기간에 오페라 공연이 열리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찾았을 때는 공연이 없었다. 보기엔 별로 커 보이지 않았는데, 극장 내부는 중세시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벨벳으로 둘러 쌓인 좌석과 커튼들로 굉장히 고급스러운 모습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특히 이 극장에서는 공연과 예술 관련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입학하기가 힘들지만, 일단 입학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밀라노에서의 네 번째 방문지는 두오모(대성당)를 정면으로 왼쪽에 보이는 쇼핑몰의 선구이자, 두오모와 같이 밀라노의 심볼이 되고 있는 곳 갈레리아였다. 이탈리아 초대 국왕 에마누엘리 2세의 상을 기념해 이름 붙여졌다. 석조 전통 공법을 기반으로 한 밀라노 건축 기솔의 종결이라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천정의 프레스코화는 각각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미국을 나타낸다. 프레스코화 속에 디자인된 소의 움푹한 곳에 뒤꿈치를 태워 회전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전해진다. 갈레리아 내에는 명품 매장들과 카페테리아들이 즐비해 있다. 중앙에 4거리 모퉁이에 3개의 명품 매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맥도날드는 좀 놀라웠다. 바닥에 그려진 소 그림에 뒷꿈치를 대고 3바퀴를 돌며 기도했다. ‘땡칠이들, 책 다 쓰게 해 주세요.’ 라고.(ㅋㅋㅋ)



그리고 갈레리아 4개의 출구 중 하나의 출구 바로 옆에 있는 두오모!!! 대성당이란 뜻을 가진 ‘두오모’. 밀라노 두오모는 수 백개의 뾰족한 석탑들이 성당의 외벽을 덮고 있다.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전 유럽에서 초청된 최고의 장인들이 건축한 대표적인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뾰족뾰족한 첨탑처럼 보이는 저곳에 당시 성당을 짓는데 기여를 하였던 인물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전쟁 당시, 밀라노의 곳곳이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될 때조차, 이 성당만은 피해달라는 협약을 맺을 정도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성당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당시에도 성당 내부에서 미사가 진행중이었다. 굉장히 높은 천장, 성당 내부에 있는 다양한 그림들과 조각들. 장엄한 분위기에 성당안에 들어서는 순간 압도되었다. 미사 보는 신부님들과 신자들을 보니 왠지 나도 모르게 기분이 평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탈리아의 하늘>

첫날을 제외하고 여행하는 내내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강렬한 태양과 시원한 바람이라 얘기할 것 같다. 머리 속에 군데군데 남아있던 걱정 찌꺼기들까지 싹 다 날려버리는 그런 바람이었다.

<이탈리아의 골목길>

단테가 다시 살아와도 다시 자기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라던 사부님 말씀처럼,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탈리아. 그래서 대부분의 길들이 굉장히 좁다. 그 골목길들이 우리들 시골길마냥 왠지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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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일상>

여행하는 곳곳에 걸려있던 빨래들, 서점, 시장들이 수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는 현지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하고 궁금하게 만든다.

 















떠나기 전, 이번 여행이 기대되거나 설레지 않았다. 여행을 가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여행에서 올 기쁨보다는 현실에 닥친 어려움들이 내 마음에 어떠한 여유도, 에너지도 받아들일 수 없게 소통의 통로를 꽉 막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둘째 날부터 4일에 걸쳐 진행했던 사랑이란 주제로 이야기 꽃이 펼쳐진 수업 덕분에 나를 좀 더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더 에너지가 넘치고, 유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떠나갔던 내 사랑도 어쩌면 지쳐가고 있던 나를 보며, 그 에너지를 견디지 못해서 떠나간 것은 아닐까. 중간중간 스쳐갔던 이들도 말이다. 지금껏 나는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얘기했다. 이제부터 내게 사랑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사랑이 다가와도 지나쳐 버리거나 외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얘기할 것 같다.

여행에서 얻은 두 번째는,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직업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어떤 모습의 형태로 살고 싶은지 어렴풋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해외로 나가서 살고 싶다. 1년씩, 다른 나라 혹은 다른 국가에서 살고 싶다. 죽을 때까지 매년 다른 곳들을 찾아 살다보면, 죽기 전에 최소 30여개의 나라에서 살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게 필요한 것은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 뭐가 있을까? 여행 중간쯤부터 이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각국에서 살면서 그 특색을 살릴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해 보기도 하고, 예전에 잊고 있었던 꿈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무엇을 하던지 간에 현실적인 문제들이 눈 앞에 산재 해 있지만, 이제 현실로 돌아왔으니, 차근차근 현실적인 고민들을 풀어내 보려고 한다.

마지막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나리 선생님께서 했던 말이 내 머리를 때리고, 가슴 속 깊이 울려 퍼졌다. “나는 지금껏 쉬운 선택만을 해 왔던 것 같아요.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여행을 떠날 때에도, 여행지에 가서도 항상 내 마음을 괴롭게 했던 지금 나의 현실, 나의 일등에 대한 고민들. 이것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 같았다. 매번 내가 할 수 있는 쉬운 선택만을 해왔던 것이다. 운명이라고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선택들. 내가 적극적으로 찾고, 준비하고, 노력해야 하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다. 물론 두 가지 선택들 중에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따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내 삶에 큰 변화가 필요한 이 시점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최선의 선택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의 최선의 선택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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