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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책 이야기

49.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알랭드 보통)

by 신치 2020. 4. 23.

1. 저자에 대하여 - 알랭드 보통

알랭드 보통은 1969년 12월 20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철학자, 소설가, 수필가이다. 그는 8살까지 스위스에서 살면서 불어와 독일어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으로 이주한 후 고등학교는 옥스포드에 있는 Dragon School에서 다니게 되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동대학교에서 철학박사과정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는 Global Asset Management의 설립자인 Gilbert de Botton이다.  현재 영국 런던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 중이다. 그는 일상의 삶과 철학의 관련성을 강조한다. 2008년 8월에 그는 런던에 새로운 교육 시설의 창립 구성원이 되었는데 그곳의 이름은 “삶의 학교(The School of Life)”이다. 2009년 5월에 그는 새로운 건축단체 “살아있는 건축(Living Architecture)”의 창립 구성원이 되었다.

23살인 1993년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로 데뷔했으며 이 외에 철학적 연애소설은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 있으며, 독특한 문학평론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불안에 관한 인간의 상념을 고찰한 <불안의 책> 여행 에세이인 <여행의 기술>, 시각적 아름다움에 대한 의문을 탐구한 <행복의 건축> 등이 있다. 보통은 사랑, 행복, 불안 등 현대인의 관심사를 주제로 책을 써왔다. 보통이 출간한 저서들은 국내에서만 누적 판매 부수 100만 부를 넘기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03년 2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명예인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 드 로드르 데자르에 레트르라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츠베탕 토도로프, 로베르토 칼라소, 티모시 가튼 애쉬, 장 스타로뱅스키 등과 같이 유럽 전역의 뛰어난 문장가에게 수여되는 <샤를르 베이옹 유럽 에세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ㄹ

보통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The Independent on Sunday” 지에 꾸준히 칼럼을 썼다. 이 신문은 “보통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대중화하는 능력은 실로 놀랍다”고 이야기한다. 보통은 그의 경험과 생각을 예술, 철학적인 사고와 버무려 책으로 엮는데, 그의 책은 “일상의 철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그의 첫 작품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원제 Essay in Love)’는 청춘 남녀의 연애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일종의 연애소설이지만, 플라톤, 파스칼, 니체, 존 스튜어트 밀에서 마르크스까지 다양한 사상가가 등장한다. 모호한 연애의 감정을 사상가의 입을 빌어 뚜렷하고 명쾌하게 해부한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 20만부가 넘게 세상에 팔렸다. 2010년에 로맨틱 코미디인 ‘my last five girlfriends’로 영화화 되기도 했다. 보통은 프랑스 혁명이나 공산주의의 실험이 남녀간의 사랑과 비슷하다고 한다. 딱딱하고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알랭드 보통의 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공 철학 강의>

제 경우에는 커리어의 위기가 보통 일요일 저녁에 찾아오곤 합니다. 해가 막 질 무렵이 오면 제 자신에 대한 저의 희망과 삶의 현실 사이의 간극이 고통스럽게 커지기 시작하고 결국 전 베개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게 되죠. 제가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제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는 주기적으로 커리어의 위기가 찾아와 주춤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 우리의 생활이나 커리어에 대한 생각이 일종의 위협적인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윤택한 삶을 살기가 쉬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커리어에 대한 불안 없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죠. 그래서 이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커리어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지 말이죠. 왜 우리가 커리어 위기의 희생자가 돼서 베개를 눈물로 적셔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주변에 속물들이 많기 때문이죠.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특히 해외에서 옥스포드에 오신 분들에겐 그럴 겁니다. 속물근성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때로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속물근성이 영국만의 특징적 현상이라고 생각하죠. 시골의 별장이나 직위에 집착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속물 근성은 글로벌 현상입니다. 우리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고 이건 글로벌한 현상입니다. 실제로 나타나고 있죠. 속물이란 게 뭘까요? 속물은 누구든 당신의 작은 일부분을 가지고 당신의 사람됨 전체를 정의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속물근성 중에서도 오늘날 두드러지는 건 직업에 대한 속물적 태도입니다. 파티에 가자마자 몇 분 후면 겪게 되죠. 21세기 초를 사는 현대인에겐 너무나 익숙한 대표적인 질문,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거든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당신을 만난 걸 엄청나게 기뻐하거나 시계를 보면서 핑계를 대고 사라집니다.

그럼 속물의 반대는?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여러분이나 제 어머니가 그렇다기보다 이상적인 어머니가 그렇다는 거죠.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성취한 바가 중요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죠.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에게 투자하는 시간의 양을 그들에 대한 애정과 엄격히 연결지어 생각합니다. 꼭 연인간의 애정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포함되지만, 넓은 의미의 애정과 존중을 얼마만큼 허용할 수 있느냐와 연결짓고, 이는 엄격하게 사회적 계층구조 상의 위치에 따라 결정되죠.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커리어에 대해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겁니다. 또 물질적인 것에도 많은 관심을 쏟기 시작하죠. 우리는 아주 물질적인 시대에 살고 있고, 우리 모두 탐욕스럽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저는 우리가 특별히 물질적인 것 같진 않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단지 어떤 감정적 보상을 물질의 취득과 연결시킨 것 뿐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상 받길 원하는 겁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사치품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페라리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탐욕적이라기 보다 상처받기 쉽고 애정이 결핍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세요. 경멸보다 동정하란 이야깁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어요. 우리가 과거보다 평정을 찾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비교적 좋은 것과 연계되어 있으니 모순이랄 수 있는데, 바로 우리 모두가 커리어에 대해 갖는 희망입니다. 인간이 일생동안 이룰 수 있는 업적에 대해 지금만큼 기대가 컸던 때가 없었어요. 우리는 여기저기서 누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얘길 듣습니다. 여기에는 숭고한 평등의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엄격하게 정의된 계층이 없지만, 여기에서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시기심과 질투를 말하는 것은 금기사항이죠. 하지만 현대 사회에 하나의 지배적인 감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질투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보다 훨씬 부자인 영국여왕을 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여왕을 부러워하지 않는 건 너무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다른 사람이라 공감할 수 없는거죠. 공감하지 못하면 시기하지도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 배경 등이 비슷해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시기할 위험도 커집니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세상 전체를 학교처럼 만든다는 문제가 잇습니다. 모두 청바지를 입고, 모두가 똑같아요. 그러면서 꼭 같진 않죠. 결국 평등의 정신이 뿌리깊은 불평등과 결합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이 만들어지는거죠. 현대에서 빌게이츠만큼 부자가 되는 것은 17세기에 프랑스 귀족이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거죠. 미디어를 통해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열정과 몇 가지 기발한 기술적 아이디어, 그리고 차고만 있으면 우리도 대단한 일을 벌일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죠. 이는 서점의 자기계발서적에서 확인할 수 잇습니다. 자기계발서는 두 가지 종류죠. “당신은 할 수 있다! 이룰 수 있고, 뭐든 가능합니다!”라고 하는 종류와 ‘자신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움’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종류가 있죠. 이 같은 낮은 자존감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어요. 강한 긍정성이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커리어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에 하는 이유는 성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와 연관됩니다.

성과주의 사회란 뭔가요? 

성과주의 사회란 재능과 열정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로 올라갈 수 있으며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생각이나 문제는 우리 사회가 정말 위로 오를만한 사람이 올라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회에서 갖는 위치가 결국 각자가 자초한 마땅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실패의 충격은 더 가혹해집니다. 중세 영국에서 아주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불운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이런 사람들을 ‘실패자’라고 부릅니다. 불운한 사람과 실패자 사이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죠. 이는 400년간 삶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변했음을 보여줍니다. 개인주의적 선진국의 자살율이 높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본인에게 일어나는 일을 극도로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인정하지만, 실패도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이와 같은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성과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미친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불가능한 꿈이죠. 우연한 요소가 많아서 모든 사람을 등급을 매기는 것이 불가능하기 대문이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제가 좋아하는 멋진 말이 있습니다. “인간을 그 지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말이죠. 즉 “당신이 만나는 누군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그 명함을 보고 판단하는 건 죄악”이라고 할 수 있는거죠. 중요한 건 누구든 다른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하는 경우나 실패에 대해 생각할 때 두려운 건 남들의 판단과 비웃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비극적인 상황에서 배워야 합니다. 햄릿을 실패자라고 하는 건 말도 안되죠. 그는 실패했지만 실패자는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이지이자 정말 주요한 이유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영웅은 인간적 영웅입니다. 대부분 다른 사회에서는 중심에 초월적 존재-신, 영혼, 자연의 힘,우주 등- 에 대한 숭배가 있었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습관을 다소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이나 인간사를 벗어날 수 있는 자연에 이끌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성공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그 의미를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공에 대한 저만의 이론을 말씀드리죠. 모든 것에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일과 생활의 균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데 말도 안되죠. 다 가질 수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제 생각에 현명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할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확고히 하고 우리 자신의 야망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하는 것도 나쁘지만 그 보다 더 나쁜 건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다가 그 여정의 끝에서 자기가 원한 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겁니다.

 

사회자 질문 : 어떻게 두 가지를 양립할 수 있을까? 
보통 : 저는 단지 우연성이 성공과 실패의 과정에 포함된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 모든 것의 정당성만을 강조하기 때문이에요. 정치가들은 항상 정의에 대해 말하죠. 저 역시 정의를 믿습니다. 단지 실현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정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건 우리가 누구와 만나든, 그들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간에 우연성이 상당 부분을 차지할 거란 사실입니다. 저는 단지 그 우연성을 충분히 고려하자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폐쇄적이 될 수 있어요.

그렇게 유명한 알랭드 보통을 이제서야 만났다. 그리고 다른 책들보다 나는 이상하게 그가 프루스트에 대해서 쓴 책이 읽고 싶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프루스트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도대체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느낌을 주는 글이란 어떤 것일까? 글, 책이란 그 작가의 농축물이라는 프루스트의 말처럼 알랭드 보통이 쓴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서 간접적으로 프루스트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 그의 삶,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그의 글을 통해 온전히 느껴보고 싶었다.

아마 보통의 다른 책들을 먼저 읽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보통의 글, 철학에 대해 먼저 알았다면, 그가 프루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조금 더 와닿았지않았을까 싶다. 특히 그의 저자에 대한 기록을 찾으면서 그가 한 강의를 보고 이 사람의 생각에 완전 빠져버렸다. 무한긍정의 시대에서 실패자, 개인에게 돌아가는 수많은 화살들이 얼마나 많은 우울증 환자들을 양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 역시 그 중 한명이니 공감이 될 수 밖에… 이 책을 통헤 좋은 작가 둘을 함께 만나서 매우 좋다.


<참고자료>
1)     http://ko.wikipedia.org/wiki/%EC%95%8C%EB%9E%AD_%EB%93%9C_%EB%B3%B4%ED%86%B5
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38386
3)     http://en.wikipedia.org/wiki/Alain_de_Botton
4)     http://goster.egloos.com/4049523
5)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emphre&logNo=30117152388
6)     http://www.ted.com/talks/lang/ko/alain_de_botton_a_kinder_gentler_philosophy_of_success.html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얼마나 많은 계획과 여행, 정사, 연구 등을 그것-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감춰놓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뭐든지 끝없이 미루기만 하는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그런 것들 것 결국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p10
→ 결국 수많은 계획들도 미래에 다가올 ‘오늘’을 잘 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과거의 내가 그랬다. 미래에 대한 확신. 사실 지나고 보면, 확신했던 미래가 온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파국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가운데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생활의 중심부로 돌아온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는 태만이 욕망을 잠재우기 때문입니다.
→ 정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 새로운 욕망만이 생겨날 뿐이다.

죽음의 임박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낀다. p11

앞으로 몇 년 사이에 그런 파국과 유사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견이라도 했는지, <랭트랑지장>에 답변을 보낸 지 불과 넉달 만에 그는 감기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쉰한 살이었다.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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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그는 19세기 말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이른바 정상성의 증표를 보여주는 전문적인 포부 가운데 그 어떤 것에도 닻을 내리지 못했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둔 분야는 문학뿐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그는 꽤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의욕이나 능력이 충만한 듯하지 않았다. 착한 아들이던 그는 처음에는 부모님이 인정할 만한 어떤 일을 하려고 시도했다. p18
→ 대부분의 젊음들이 그렇다. 대학을 졸업할 때, 부모님이 인정할만한 삶을 살기 위해 스펙을 쌓고, 대기업에 원서를 내고. 그러면서 실패하면 좌절한다.

“내가 변호사도, 의사도, 사제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 과연 무엇이 남았을까?” 점점 더 절망에 빠진 스물두 살의 프루스트는 이렇게 자문했다.

어쩌면 사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마자랭 도서관에 지원해서 무급 자리를 하나 얻었다. p19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마침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프루스트가 가정부에게 고백한 야심이다.

“아, 셀레스트. 아버지가 병자들을 위해 한 것만큼 내 책으로도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만 있다면.” p20
→ 지금 내게 필요한 확신도 프루스트가 가지고 싶었던 그것이다. 결국 ‘내 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것이다’라는 확신이 필요한 것일까?

“소설을 읽는 사람은 십중팔구 여주인공에게서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특징을 찾아내게 마련이다.” 프루스트의 이 말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p32

이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의 진실성에 대한 증명이다. p33
→ 내 책이 말하는 바.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오디세이아>의 등장인물과 인사를 나누고픈 우리의 애초 충동이, 마치 어느 시립 동물원의 우리 안을 맴도는 오리너구리 가족인 양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일지 모른다. p35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배려의 말을 건네는 쪽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소설의 가치란 단순히 그 감정 묘사에만, 또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있는 실제 인물과 등장인물 간의 유사성 등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인식하기는 하지만, 차마 우리 자신의 힘으로 공식화하지는 못했던 인식을 지목하는 능력에까지 뻗어나가는 것이다. p37

이 책은 우리를 민감하게 만들 것이며, 그 책 자체의 발달된 감수성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우리의 잠자는 안테나를 자극할 것이다.

어느 천재의 새 걸작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이 경멸했던 심사숙고를, 스스로가 억눌렀던 기쁨과 슬픔을, 스스로가 비웃었던 감정의 온 세계를, 그런 것들을 담고 있는 바로 그 책이 문득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런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된다. p39
→ 억눌렀던 누군가의의 기쁨과 슬픔, 감정의 온 세계, 가치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그런 책.이 되려면 나는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가?

3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그러나 그가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어떻게 뒤척이고 돌아눕는지를 묘사하기 위해서, 왜 한 장에서 무려 30쪽이나 굳이 할애해야 하는지를 나는 알 수가 없더군.”

그런데도 정작 이게 도대체 무엇에 관한 내용인지에 대한 단서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전체의 핵심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전체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전체는 앞으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p44

다른 출판사들도 이런 심정에 공감했던 까닭에 프루스트는 어쩔 수 없이 자비를 털어 책을 펴냈다.(그리고 몇 년 뒤에야 쏟아진 출판계의 후회와 회개의 사과를 즐기는 입장이 되었다.) p45
→ 나도 결국 이런 책을 써내야 하는 것이다. 내 책을 거부한 출판사들의 후회를 할 수 있는 그런 책 말이다.

잠이 들었다? 그것은 단 두 마디 말만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혹시나 주인공이 소화불량을 겪었거나, 또는 래브라도 한 마리가 저 아래 정원에서 새끼를 낳고 있었다면 아마 넉 줄 정도의 문장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현학자는 단순히 잠에 대해서만 옆길로 샌 것이 아니었다. 그는 디너파티, 유혹, 질투에 관해서도 똑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p46

프루스트의 소설은 잃어버린 시간의 돌이킬 수 없음을, 순수와 경험을, 시간 외적인 가치와 되찾은 시간의 복원을 표면적으로 말하고 있다. p47

5만 명의 전사들에 대해서도 잊은 채, 신문을 옆으로 치워버리고, 일상의 지루함에서 오는 우울의 약한 파도를 경험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이것은 프루스트의 방식이 아니다. 그의 전반적인 철학, 그러니까 단순히 뭔가를 읽는 것에 대한 철학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철학이기도 한 것은 뤼시앵 도데가 지나가듯이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드러날 것이다.

단신으로 나온 내용을 그가 다시 이야기하면 졸지에 한 편의 비극 또는 희극 소설로 변모했는데, 이는 그의 상상력과 환상 덕분이었다. p50
→ 신문기사의 어느 한 부분이 비극으로 바뀌는 순간. 실패자가 아닌 그저 하나의 실패가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결국 단신과 같은 나의 일상을 나는 프루스트와 같이 하나의 비극 또는 희극 소설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사에서 그는 달랑거리는 눈알과 단검에 관한 지저분한 이야기를 보다 넓은 맥락에 맞추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유례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끔찍한 살인사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대 그리스 이래로 서양 예술의 위대한 걸작들 가운데 상당수의 근저에 깔린 인간 본성의 비극적 국면의 표현이라고 판정했다. p52

프루스트의 주장은 바로 예술작품의 위대함은 그 소재가 가진 외관상의 성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그 소재에 대한 차후의 처우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며, 아울러 여기에 덧붙인 그의 또 다른 주장은, 세상 만물이 잠재적으로는 예술을 위한 풍요로운 주제이며, 우리는 비누 광고에서도 파스칼의 <팡세>만큼이나 가치 있는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p56
→ 나의 일상이 일기가 아닌 하나의 책으로 탄생하기 위해서 일상에 대한 차후의 처우와 깊은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팡세>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 글은 매력적인 즉시성이 있으며, 보편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화제들을 현대적인 간결함으로 서술하기 때문이다. p57

왜냐하면 지방의 기차역 이름을 읽는 것만으로도 프루스트의 상상력은 전체 세계를 공들여 만들기 위한 재료를, 즉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가정 드라마, 지역 관청에서 벌어지는 간계, 들판에서 펼쳐지는 삶을 그려내기에 충분한 재료를 얻었기 때문이다.
→ 이래서 일상의 어느 한 조각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조각들이 내게 주는 영감들을 발견해내야 한다.

이러한 제멋대로의 읽을거리로부터 얻는 즐거움이야말로 작가에게는 전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란 외관상 위대한 예술과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듯 보이는 것을 향한 열광을 가졌으리라고 여겨질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프루스트는 주장했다.
→ 위대한 예술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듯 보이는 나의 일상. 일상에서 어떤 열광을 발견하고 드러낼 것인가.

이렇게 너무 빠르지는 않게 지나감으로써 얻는 이익이란, 그 과정에서 이 세계가 훨씬 더 흥미로워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점이 아닐까? p62
→ 느리게 보기, 느리게 생각하기. 세심하게 보기.

4 성공적으로 고통 받는 방법

누군가의 생각이 지혜로운지 여부를 평가하는 좋은 방법은 아마도 그 사람의 정신과 건강 상태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어떤 저자에 관해서 우리 자신에게 상당수의 질문을 제기하고 또 그 질문에 답변하며,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고 스스로의 입으로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를 완전하게 파악했다고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p67

“얘, ‘아주 오래잤다’는 네 말은 나한테 아무것도,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단다. 내가 이렇게 묻고 또 묻지 않니.

네가 잠자리에 든 시간이 몇 시고…
네가 일어난 시간이 몇 시인지를…” p71

 

(아마 마르셀의 어머니와 생트뵈브가 만났더라면 서로 이야기할 것이 상당히 많았으리라.) p72

나는 평생 한창때인 청년들만 ‘꺾었던’ 원숙한 지혜의 달인인 두 사람에 대해서 너한테 말해주고 싶어. 바로 소크라테스와 몽테뉴야. 그들은 나이 어린 청년들이 ‘즐기는’ 것을 허락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청년들이 모든 쾌락에 관해서 알게 되고 과도한 부드러움도 방출할 수 있다고 봤지. 그 두 사람은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각성된 ‘분별력’이 있는 청년들에게는 어리석고 타락한 여자들과의 연애보다는 차라리 이처럼 한때나마 관능적이고 지적인 우정이 더 낫다고 주장했어.” p75

 그는 연이어 청년들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그들은 결코 응답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성별과 나이를 바꿀 수만 있다면, 젊고 예쁜 여자의 외모를 취해서 자네를 진심을 ㅗ끌어안아줄 텐데.”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하는 사람이 항상 동일인인 것은 아니다.” p76

서른 살 때의 자체 평가 : “즐거움도, 목표도, 활동이나 야심도 없고, 내 앞에 놓인 삶은 끝났고, 내가 부모님께 준 고통을 생각하니, 나는 전혀 행복하지 못하다.” p79
→ 지금 서른 살. 나에 대한 자체 평가 : 즐거움도, 목표도, 활동이나 야심도 없다. 내가 지금 어머니에게 주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니, 괴롭다. 하지만 전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즐거움, 목표, 활동, 야심 따위를 찾을 거니까. 그것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는 요트에 살면서, 침대에서 굳이 나올 필요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기도 했다. p82
→ 얼마 전 실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그들은 행복할까?

 “우리가 배를 한 척 빌리면 어떨까요? 거기라면 아무런 소음도 없을 테고, 또 침대(또는 침대들)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도 이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이 연이어 해안을 따라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녀는 프루스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완전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삶을 꿈꾸는 프루스트.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때문에 많이 외로웠겠다.

“사람이 슬플 때에는, 침대의 온기 속에서 누워 있는 것이 좋다. 그 안에서 모든 노력과 분투를 포기하고, 머리를 이불 아래에 파묻은 채, 완전히 항복하고 울부짖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마치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p83
→ 슬플 때는 그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 슬픔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달 뒤에 비틀거리면서 오페라를 보러 갔다. p86

오제는 만약 그가 항상 그렇게 몸이 아팠다면, 그 손상은 대개 자초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 즉 커튼까지 달아놓은 방에서 하루 종일 머무른 결과, 즉 그로 인해서 건강의 두 가지 요소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보겠다고 말이다. 그 두 가지란 바로 햇빛과 맑은 공기였다. p87
→ 아프면 이 두 가지를 거부할 수 밖에 없다. 두 가지를 거부해서 아픈 것일 수도 있지만. 아파서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두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되고 싶어할까? 로베르일까 아니면 마르셀일까? p90

그러나 어떤 사물을 지각하는 능력만큼은 로베르가 형의 뒤를 쫓아가는 형국이었다.

다만 어떤 사물을 느끼는 것(대개는 어떤 사물을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은 어느 층위에서인가 지식의 획득과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으리라. p91

프루스트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고통을 겪고 나서야, 무엇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것을 진정으로 배우게 된다.
→ 정말. 그렇다. 고통은 겪는 순간에 많이 아프지만, 지나고 나면 많은 것을 남겨놓았다. 내가 여러 회사를 거치며, 일하고 싶은 회사를 찾은 것처럼?

물론 우리는 굳이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도 정신을 이용할 수 있지만, 프루스트의 제안은 오직 고통을 받을 때에만 우리가 적절하게 탐구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받고, 따라서 우리는 생각을 한다. 생각은 고통을 체계화하도록 우리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생각은 고통의 기원을 이해하고, 고통의 규모를 파악하고, 고통의 현존과 화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 없이 떠오른 생각은 중요한 동기 부여의 원천을 결여한 셈이 된다.

프루스트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지혜를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생님을 통해서 고통 없이 얻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삶을 통해서 고통스럽게 얻는 것이다. p93
→ 확실히 고통을 통해 얻는 편이 오래 남는다. 각인된다.

하지만 그들이 불쌍한 피조물이고, 교조주의자의 나약한 후에이며, 그들의 지혜는 부정적이고 메마른 것에 불과하네. 지혜란 누구한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고, 다만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대신 수행해주지는 않는 여행을 통해,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면제해주지는 않는 노력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일세. p94
→ 지혜란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 지혜란 주로 고통을 통해 배우는 경우가 많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 이 슬픔은 우리가 더 행복한 시절이라면 회피했을 일종의 정신적 체육 활동을 거치도록 해준다.
→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강인해진 것일까? 일생에 걸친 그 슬픔 때문에?

우리가 정신 능력의 발달에 진정한 우선순위를 둔다면, 우리는 만족보다는 오히려 불행한 채로 있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것이다. p95

우리의 모든 만남을 존중해야 한다면, 왜 우리가 사회 생활의 굴욕에 관해서 조사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게 될까? 오직 슬픔 속에 빠졌을 때에야만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진실에 맞서고자 하는 프루스트적인 자극을 받게 된다. p96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루스트의 논리는 위중한 질병으로 종종 괴로워하는 의사를 찾아보라는 지혜를 제안한다. p98

이제는 프루스트가 겪은 불운의 크기가 그의 생각의 타당성에 의구심이 들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는 오히려 실제로 그가 겪은 고통의 정도 그 자체를 통찰을 위한 완벽한 전제조건의 증거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이다.

고통에 대한 낭만적인 숭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고통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분했던 적이 없었음을 반드시 덧붙여야겠다.

불행한 매독 환자는 많아도 그 중 상당수는 <악의 꽃>을 쓰는 대신 총으로 자살했다. p99

불행의 끈덕진 반복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효과적인 접근방식이야말로 행복을 향한 모든 유토피아적 추구의 가치를 거뜬히 능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한 삶의 기술이란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개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p100

슬픔이 생각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그 능력 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린다.
→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능력의 상실하는 일부가 창의적인 방식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이 생각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즉 우리에게 더 나은 현실 감각을 부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유해한 방향으로 밀어가는 일 역시 너무나도 자주 일어난다. p101
→ 슬픔을 글로 승화하는 대신,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처럼 말이다.

이 유명인사들은 그녀를 매우 흥분시키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실망을 설득력 없는 무관심의표시로 위장하는 것뿐인 셈이다. p103

더 나은 해결책 : 베르뒤랭 부인이 그토록 심한 고통을 겪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가진 것보다도 가지지 못한 것이 항상 더 많기 때문이며, 우리를 초대하는 사람보다는 초대하지 않는 사람이 항상 더 많기 때문이다. p104

그녀는 자신의 좌절을 가볍게 만드는 법을 배울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 과정에서 그녀가 나름의 매력을 발휘할 경우, 결국 엘리제 궁전으로의 초대는 실제로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중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p105

문제에 대한 대응법 : 프랑수아즈는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자처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녀는 서가에 있는 모든 책을 곧바로 읽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으므로, 그녀는 도서관에 비해 지식이 덜 널려 있는 장소에 있음으로써 견딜 수 없는 자신의 무지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있었다.

박식한 사람이 되기 위한 선결조건은 바로 자신의 무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체념하고 적응하는 것이다. p107

문제에 대한 대응법 : 자기보다 못한 사람도 겸손하게 사과할 법한 상황에서도 블로크는 극도의 자기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며,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치욕이나 부끄러움도 드러내지 않는다. p108

다만 그는 자신이 타인의 마음에 들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상황을 참을 수 없어하는 것 같다.

더 나은 해결책 : 시계, 우산, 사과 p109

더 나은 해결책 : 심부름꾼이고 요리사고 하인이고 완두콩이고간에 아예 쓰지 마라. p112

때때로 우리는 사람들이 뭔가를 우리에게 숨기지 않는가 의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사랑에 빠져서 우리의 탐구를 재촉해야 할 긴급함을 느낀 다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답변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각자의 실제 삶을 위장하고 숨길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경향이 있다. p115

교훈? 타인이 예기치 못한 그리고 상처가 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 단순히 안경을 닦는 것보다는 더한 뭔가로 반응하라는 것, 다시 말해서 그 행동을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불운한 고통의 체험자들에 비하면, 자신의 슬픔에 대한 프루스트의 접근 방식은 오히려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p116

비록 그의 지식에는 빈구석이 현저히 많았지만, 그것을 채우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거 자신의 실망 때문에 공연히 집안 고용인들에게 분풀이를 했다는 증거도 없다. p117

우리의 만족을 위한 최고의 기회란 바로 우리의 기침, 알레르기, 사교상의 실수, 감정적인 배신 등을 통해서 암호화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공되는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완두콩, 따분한 사람, 시간, 날씨를 탓하는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피하라는 것이다. p118
→ 매 순간 내게 일어나는 상황 속에 지혜를 얻는 기회가 존재하고 있다.

5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프랑스어에 영어를 간혹 곁들이고, 잉글랜드 대신에 알비옹이라고 말하고, 지중해 대신에 그랑드 블뢰라고 말하는 것. 1990년경에만 해도, 이는 뭔가 똑똑하고 많이 아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소망을 가졌다는 증거였고, 그러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불성실하고 과도하게 공들인 기본 구절들에 의존한다는 증거였다. p120

“하지만, 이보게 뤼시앵, 그런 대단함은 자네의 ‘빰, 빰, 빰’에 실려 전달되는 게 아니야! 그러니 자네는 차라리 그런 대단함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려고 시도하는 편이 더 낫겠네!”

이것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어휘를 찾아내고자 하는 데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p121

우리는 뭔가를 느끼고 나면, 그 느낌과 가장 근접한 구절을 향해 손을 뻗거나, 또는 의사소통할 내용을 흥얼거릴 수 있지만, 결국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 것을 제대로 나타내는 데에는 실패하고 만다.

그 표현의 빈곤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대화 상대가 살면서 겪은 일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p122

이 탁월하고 비극적인 작품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이 소설이 여러 가지 클리셰(진부한 표현)으로 가득하다는 점도 물론이었다. “자네의 소설에는 몇 점의 훌륭하고 커다란 풍경화가 있다네.”

“하지만 때로는 그 풍경화를 보다 독창적으로 그렸으면 하고 바랄 사람도 있을 걸세. 해질녘에 하늘이 불타는 듯하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네만, 그 표현은 너무 자주 이야기되거든. 그리고 달빛이 은은하게 비친다는 표현 역시 약간은 진부하네.” p123

클리셰의 문제란, 그것들이 잘못된 생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매우 좋은 생각의 피상적인 연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애초에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느냐를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p124
→ 그렇다면. 내가 진부하고, 추상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내가 그 정도로 밖에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 어렵다…

가끔 오후에 하늘에는 하얀 달이 작은 구름처럼 기어올라왔는데, 그 은밀하고 내보임 없는 모습은 마치 한동안 “무대에 나올” 필요가 없는 어느 여배우가 평상복 차림으로 “객석 앞”으로 가서 한동안 자기 동료들이 출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러나 여전히 배경에 머물면서,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달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서 말해보라는 요청을 받을 경우, 우리는 신선한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진부한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우리는 달에 관한 우리의 묘사가 그 임무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한편,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향상시킬 수 있을지는 미처 모를 수 있다. 프루스트의 답장에 따르면, 이보다 더 그를 괴롭혔던 사실은 언어적 규약(“황금빛 규제”, 또는 “하늘의 물체”의 경우처럼)을 따르는 것이 항상 옳다고 믿은 사람들, 그리고 무슨 말을 할 때에는 독창적이 되기보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의 말처럼 들리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구사하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클리셰의 사용이었을 것이다. p126

 “왜 굳이 ‘1871년’이라고 하고 나서 ‘그 어떤 해보다도 더 지독했던 해’라고 덧붙였을까요. 왜 파리는 곧바로 ‘거대한 도시’로, 들로네는 ‘거장 화가’로 일컬얻지는 것일까요? 왜 감정은 예외 없이 ‘차분한 것이며, 온화함은 ‘미소짓는’ 것이며, 상실은 ‘잔인한’ 것이며, 제가 차마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다른 훌륭한 구절들이 수없이 들어 있는 것일까요?” p129

 좋은 글쓰기의 우선순위는 선례를 따르는 것, 즉 역사상 가장 저명한 저술가들의 사례를 따르는 것인 반면, 나쁜 글쓰기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에게 경의를 표하기를 회피하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글을 써도 무방하다는 완고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드락스는 생각했다. p130

모든 작가에게는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는 모든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자기만의 “음색”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야 할 의무. 그래서 다양한 작가의 글을 읽어야 하나보다. 다양한 언어를 접해보고 얼마나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는지 알아갈 필요가 있다.

작가가 글을 잘 쓰려면, 그에 앞서서 독창적이어야 하며, 또한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정확성, 즉 문체의 완벽성도 분명히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창성의 저쪽에, 그것도 그 모든 잘못을 거친 다음에야 있는 것이지, 이쪽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를 공격하는 것뿐입니다. p131
→ 언어를 공격한다는 것은 도대체 뭘까?

자신의 정체성을 납작하게 눌러서 사회적 속박이라는 봉투 안에 쏙 들어가게 만드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  이 표현, 정말 마음에 든다!!!!! 현재 청춘들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한 것 같다!!!

프루스트가 제안하는 것처럼, 만약 우리에게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면, 이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에게는 클리셰로부터 자유로운 차원이 있기 때문이며, 그 차원이 생각의 독특한 음색을 훨씬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예법을 무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p134

이것은 세상 그 자체에는 훨씬 더 넓은 범위의 강우와 달과 햇빛과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이를 포착하거나 우리에게 기대하도록 가르치는 기존의 표현들은 이보다 훨씬 더 적기 때문일 것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에는 표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p137

만약 그가 두번 다시 면도를 하지 않겠다고 할 경우, 그녀는 내일이라도 당장 그의 곁을 떠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 최소한 이보다는 더 심오한 원천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작용에 대한 클리셰적인 설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변태의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것에 관한 보다 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p139

만약 그의 작품이 유별난 듯이 보인다면, 그 이유는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우리가 본다고 아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보는 대상을 그리려고 그가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p143
→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느낌이다.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말이 무섭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프루스트는 그가 아는 바를 뛰어넘는 저 너머의 무언가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지 않은가?

교훈? 삶이란 클리셰적인 삶보다도 더욱 낯선 실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검은방울새는 종종 그 부모와는 다른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플루플루, 미주 또는 불쌍한 작은 늑대라고 부르는 데에는 무엇인가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p145

6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

그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우정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냥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다고. – 조르주 드 로리 p148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시를 자기 책에 집어넣지 않았으며, 그에 상응하는 만큼을 자기 삶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 월터 베리 p149

한 시간 동안 친구와의 대화를 위해서 한 시간 동안 일을 포기한 예술가는 자신이 차마 존재하지도 않는 뭔가를 위해 현실을 희생시켰음을 알고 있다.

우리가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어쩌면 단 일분의 공허함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p151

그리고 우정이란 결국 이런 것에 불과하다.
“….. 우리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혼자는 아니라고 믿게 만들려고 하는 거짓말.” p152
→ 아 정말.. 이런 표현은 도대체가 어떻게 나오는거냐고…!!!!!!!!!!!!!.

마치 공허하고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응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대화의 리듬은 휴지기를 용인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지속적인 반응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의 공허함을, 그리고 우리가 가지지 못한 잃어버린 기회를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책은 우리의 산발적인 정신의 증류물을, 그 가장 생생한 표명의 기록을, 영감을 주는 순간들의 농축물을 제공한다. p157

대화는 우리의 원래 발언을 수정할 수 있는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데, 이것은 최소한 한번이라도 실제로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정착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알지 못하는 우리의 경향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반면 글쓰기는 이런 경향에 잘 들어맞으며, 그 중 상당 부분은 다시 쓴 것이고, 그 와중에 원래의 생각들-노골적이고 모호한 실마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풍부해지고 미묘한 차이가 덧붙여진다.

프루스트는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쓰려고 했던 것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다. p158
→ 몹시 위안이 되는 말!!! 나도 요즘 매일 글을 쓰면서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변한 것은 이 소설의 전반적인 형태뿐만이 아니었다. 각각의 페이지와 수많은 문장들이 더 자라났거나, 처음의 표현에서 인쇄된 형태로 되는 과정에서 변경되었다. p159

이 소설은 그보다 더 비판적이며 능숙한 일련의 저자들의 작품이다. (어림잡아도 3명이다. 원고를 쓴 프루스트 1 + 원고를 다시 읽은 프루스트 2 + 교정쇄를 수정한 프루스트 3)
→ 너무 웃긴다. 보통의 위트가 돋보이는 구절이다. 프루스트를 세개의 자아로 나누다니. 놀랍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완전 빵 터짐.

조이스는 훗날 <율리시스>의 내용 가운데 3분의 1은 교정지에 추가해서 쓴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p161

책이란 우리의 습관 속에서, 사회 속에서, 우리의 악덕 속에서 우리가 보여주는 자아와는 또 다른 자아의 산물이다. p162
→ 공감된다. 책을 위해 글을 쓰면서, 나 역시 다양한 자아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진정으로 친절한 사람이 얼마나 드문지를 깨닫고 무한한 슬픔을 느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p164

앞에서 진단했던 그의 낮은 자존감에 관한 입장 때문에, 그는 친구를 한명이라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과도하게 친근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p165

내가 정말 슬플 때에 나의 유일한 위안은 사랑하고 또 사랑 받는 것뿐이다.
→ 정말 슬플 때 위안이 되는 것. 사랑하고 또 사랑 받는 것. 사랑받는다는 느낌만으로도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 결국 존재감을 확인해야한다는 것 아닐까…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는 서투르지 않았을까?” “그들이 우리를 좋아했을까?” 물론 이런 것도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밀려서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은 프루스트가 어떤 만남에서든 남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기억하고, 많이 생각하게끔 관심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친구를 만드는 기술에 통달하여 수많은 친구를 얻었으면, 그들은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 헌신했으며, 그의 사후에 천사일변도의 저서를 한 무더기 내놓았는데, 제목은 대략 이러했다. <내 친구 마르셸 프루스트>(모리스 뒤플레), <마르셀 프루스트와의 우정>(페르낭 그레그), <친구에게 보낸 편지>(마리 노들링어) p166

우정이란 텅 빈 영역이며, 그 안에서는 우리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손쉽게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와 일치하게 마련이다. 이보다는 덜 낙관적이었던 프루스트는 불일치의 가능성을 인식했고, 자신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를 이야기해서 당신을 지루하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항상 질문을 던지는 쪽이 되어서 당신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를 자신에게 털어놓게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 프루스트는 참 현명한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많이 아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슬프다는 것. 그 때의 유일한 위안은 사랑 받고 사랑한다는 것. 이런 느낌을 많이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대화에서 동반자를 즐겁게 만들려면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p167

르노 자동차의 크랭크축 쪽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굳이 풍파두르 부인의 어린 시절 쪽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고집하는 일은, 그의 논리대로라면 우정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p168

프루스트는 종종 “어쩌면” 또는 “아마도” 또는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라는 구절을 이용하여 자기 문장을 끊곤 했다. 플랑테비뉴가 보기에 이것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프루스트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들이 좋아하지 않을 이야기를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잘못 이겠지.” 그는 이런 생각을 밑에 깔고 있었다. p170

독서에서는, 우정이 갑자기 그 원래의 순수성을 되찾게 마련이다. 책을 상대로 해서는 거짓된 친절 따위가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런 친구들과 저녁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러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에 반해 삶에서 우리는 혹시 초대를 거절할 경우에는 가치 있는 우정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러 마음에도 없는 저녁을 함께 하기도 한다. p176

우정이란 로르와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인 한편, 몰리에르에게는 그가 지루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안나 드 노아유에게는 그녀가 시를 못 쓴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p177

실제로 보낸 편지 이전에 썼던 또다른 편지가 한 통 있었다. 거기에는 훨씬 더 비열한, 훨씬 덜 용인될 만한, 그러나 훨씬 더 진실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p180
→ 또 다른 편지 한통. 이 문장이 읽는 순간.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치던 대나무숲이 바로 이 편지구나. 라고 생각하게 됨.

대신 이 곤란한 생각들은 다른 곳에서는 더욱 잘 개진되었다. 바로 그 원인 제공자들에게는 지나치게 상처를 줄 수 있어서 그들과 공유하기에는 곤란한 분석들을 위해서 고안된, 개인적인 공간에서 말이다. p181

이 책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열쇠 격인 실존인물은 전혀 없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주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쇠 격인 실존인물들은 크게 불쾌감을 표출했다. p182

진실과 애정 모두를 호전적으로 추구하는 대신, 그들은 양립 불가능한 것을 식별하고, 그들의 계획을 나눈다. p184

7 눈을 뜨는 방법

그 대상의 일상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샤르댕의 그림은 비범할 정도로 유혹적이고 무엇인가를 환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p187

프루스트는 자신이 상상한 젊은이가 샤르댕과의 만남 이후에 영적 변모를 겪게 되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자신이 범속함이라고 불렀던 것에 관한 이처럼 풍부한 묘사에 그가 일단 현혹되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마땅할 것이다. 자네, 행복한가? p188

샤르댕의 작품을 보고 난 이후로는 부모님의 아파트에서 가장 누추한 방도 그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프루스트는 약속한다. p189
→ 정말? 나도 샤르댕의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프루스트는 우리를 향해서 세상 모든 것에 똑 같은 가치를 부여하라고 재촉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욱 흥미롭게도, 우리를 향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그 정확한 가치를 귀속시키라고, 따라서 이른바 좋은 삶에 관한 특정한 개념을 수정하라고 독려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p191

위대한 화가들이야말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프루스트는 그와 동시에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의 감각이 변경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각자의 화폭을 통해서 일찍이 간과되었던 심미적 특성의 음미를 우리에게 주입하는 화가들에 의해서 민감해질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p192
→ 화가라고 쓰고 작가라고 읽는다. 위대한 작가들이야말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사람이라고.

위대한 화가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들 자신의 눈이 시각적 경험의 국면들에 대한 특이한 수용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령 숟가락 끝에 나타나는 빛의 움직임, 식탁보 섬유질의 부드러움, 복숭아의 벨벳 같은 껍질, 노인의 피부의 분홍빛 색조 등이 그런 국면들이며, 이런 특성들은 또다시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의 인상에 영감을 제공한다.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바라봄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프루스트의 치료개념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샤르댕 관련 에세이의 젊은이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중화자는 양쪽 모두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으며, 흥미라고는 전혀 없는 세계에서 살다가, 문득 자신의 세계에 관한 비전에 의해서 구출된다. p194

어린 시절 이후로는 그의 입술에 닿은 적이 없었던, 따라서 이후의 연상에 의해서 변질되지도 않은 채로 남아 있던 케이크 하나가, 졸지에 그를 풍부하고도 친밀한 기억의 흐름 속으로 들어서게 해준 것이다. p196

비록 어떤 순간에는 우리에게 매우 아름다운 것 같더라도, 삶이 그토록 하찮은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삶의 증거 자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관해서 아무것도 보존하지 않는 전혀 다른 이미지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깔보는 듯이 판단한다. p197

우리가 삶이 아름답다고 믿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삶을 회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98

훌륭한 화가는 화폭 속에 무엇을 집어넣고, 무관심한 화가는 무엇을 집어넣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자발적인 기억과 무의식적인 기억을 구분 짓는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또 다른 방식이리라. p199

이와 유사하게, 무의식적인 기억과 자발적인 기억을 구분하는 것은 극미한 일인 동시에 중대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은 생명이 없다. 훌륭한 화가의 붓질에 상응하는 것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사물을 보다 완전하게 음미하지 않을까? 문제는 단순한 부주의나 게으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제는 또한 우리를 이끌고 영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자신의 세계에 충분히 가까운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만날 기회가 불충분하다는 사실로부터도 비롯된다.

 

우리를 세계에 눈뜨게 하려고 어떤 위대한 화가가 제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수많은 이미지들에 우리가 에워싸이는 것까지는 방지해주지 못한다. 비록 그런 이미지들이 어떤 사악한 의도는 없으며, 오히려 종종 뛰어난 예술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과 아름다움의 영역 사이에는 절망적인 간극이 있음을 암시하는 효과를 가진다. p201

작중화자는 단순히 경마장뿐만 아니라 바닷가 역시 가급적 피하고 있다. 바다를 바라볼 때면 그는 바다 위를 지나가는 현대식 배를 가리려고 눈앞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곤 했다.

다시 한번 엘스티르는 그를 이런 특이한 버릇에서 구제하여, 요트의 아름다움으로 주의를 돌리게 한다. p205

현대의 화가에게는, 잘 차려입은 여자들이 바다의 경기장의 푸른빛 속에서 그 빛을 쬐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레가타(요트경기)며 경마대회가, 가령 베로네세나 카르파치오가 그토록 즐겨 묘사한 축제만큼이나 흥미롭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이 사건은 아름다움이 수동적으로 마주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능동적으로 발견해야 하는 어떤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p206

이 세계를 적절하게 평가하라며 우리를 재촉할 때, 프루스트는 수수한 풍경의 가치를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프루스트가 보기에 이런 수수함은 아름다움의 특징이다. p207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이미지는 모호함이 없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p214

왜냐하면 캉브레메르 부인처럼 미술을 향한 과장된 존경이 들어 있지 않은 그녀의 순진함 속에는 진지해지려고 하는 마음이 최소한이나마 잠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p217

8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소설 속에 갇힌 이 불행한 작중인물이야말로, 결국 그 소설을 읽음으로써 치료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p220

한 사람의 매력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발언이 사랑의 이유가 되는 경우가 더 잦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니요, 오늘 저녁은 한가하지 않아요.”

만약 이 답변이 매혹적인 것으로 판명된다면, 이것은 아마도 노아의 사례에서 음미와 부재 간에 맺어진 관계 때문이리라. p227

가난은 부유보다 더 너그러운 것이며, 차마 구입할 수 없는 옷들보다도 더 많은 어떤 것을 여성에게 제공한다. 그 뭔가는 바로 그 옷들을 향한 욕망이며, 그 욕망은 그 옷들에 대한 진정하고 세부적이며 완전한 지식을 만들어낸다. p228

만약 드레스덴을 여행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르자마자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는 카탈로그에서 어떤 옷을 보자마자 곧바로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자가 운이 좋다고 한다면, 그들의 부가 욕망을 성취시키는 바로 그 속도 때문에 그들은 사실 저주를 받은 셈이다. 따라서 그들은 보다 특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감내해야 하는, 욕망과 만족 사이의 격차에서 오는 고통을 겪을 기회가 전혀 없는 셈이다.
→ 특권을 가지지 못한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감내해야 하는 욕망과 만족 사이의 격차에서 오는 고통을 겪을 기회가 많다는 것. 고통을 겪으면서 지혜도 많아질 테니까.

그는 결혼 이전의 성행위에 반대했을까?

아니다. 다만 사랑 이전의 성행위에 반대했을 뿐이다. p229

그는 그의 장밋빛 뺨에, 그녀의 까만 머리에, 그녀의 애교점에, 그녀의 뻔뻔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태도에, 그리고 그녀로부터 환기되는 여러 그리운 것들-여름, 바다 냄새, 청춘-에 매력을 느낀다. p234

 “사랑이요? 저야 그걸 자주 하지만, 한번도 말해본 적은 없어요.” p237

9 책을 내려놓는 방법

우리가 다른 사람이 쓴 책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유익함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그 한계의 음미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p239

프루스트는 자신은 단지 느낄 수만 있을 뿐 차마 표현할 수 없었던 경험들이, 러스킨에게서는 언어로 세워지고 아름답게 조립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p240

즉 가치가 있으면서도 간과된 경험의 한 측면을 습관과 부주의로 인해서 야기된 죽음의 상태로부터 되살리는 것이다.

책이 우리를 눈뜨게 해주고, 우리를 예민하게 만들고, 우리의 지각 능력을 향상시켜줄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런 작용은 중지되고 만다. 이런 중지는 우연에 의한 것도, 가끔 그런 것도, 운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며, 다만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순전하고도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p247

이것은 좋은 책(독서가 우리의 정신적 삶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필수적인 동시에 제한적임을 즉시 깨닫도록 허락해 주는 책)의 위대하고도 훌륭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저자에게 그것들은 “결론”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독자에게는 다만 “자극”이라고 불릴 수 있다.
→ 좋은 책의 정의가 꽤 마음에 든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독서의 역할이 필수적이면서 제한적임을.

독서가 우리에게 자극인 한에서는, 즉 그 마법의 열쇠가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는지 몰랐던 우리 내부 깊은 곳에 있는 거처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한에서는,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하다. p249
→ 독서는 내게 계속 자극이 되어주고 있다. 아마 계속 그럴지도…

따라서 우리는 책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책이 우리에게 주는 통찰을 반겨 맞아야 하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독립성을 예속시킨다거나 우리의 애정생활의 미묘한 차이를 덮어버리지는 말아야 하는 의무를 부과 받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프루스트가 지나치게 공손한, 그리고 지나치게 의존적인 독자에게서 식별한 일련의 증상들로 인해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증상 : 우리는 저술가를 예언자로 착각하게 된다.

두 번째 증상 :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글을 쓸 수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 “프루스트는 표현을 향한 나의 열망을 너무나 자극함으로써, 나는 문장을 시작할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아, 내가 그렇게 쓸 수만 있었다면! 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확보한 것이 가령 놀라운 진동과 침투인 순간-그 속에는 뭔가 성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에는 나도 그렇게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펜을 움켜쥐지만, 그러고 나면 나는 그렇게 쓸 수 없는 것입니다.” p257

그는 장선처럼 질기고, 나비의 가루처럼 섬세하다. 내 생각에 그는 나한테 영향을 미친 것과 동시에, 내가 쓴 문장 하나하나에 내가 짜증을 부리게 만들었다. p258

세 번째 증상 : 우리는 예술적 우상숭배자가 된다.

네 번째 증상 : 우리는 <되찾은 요리>를 구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p262

다섯 번째 증상 : 우리는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p265

 레오니 고모가 마들렌을 사온 바로 그 제과점 p267

이보다 더 정직한 방문객이라면, 사실 이 마을에 특별히 놀라운 점이라고는 전혀 없음을 시인할 것이다. p269

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테니까. p272
→ 프루스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 우선 프루스트의 눈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독서를 훈련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기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정신생활의 문턱을 넘나드는 것이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로 이끌어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충분히 내던져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p273

::: 역자 후기 :::

우리가 프루스트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까닭은, 프루스트처럼 세상에 대한 섬세하고도 호기심이 충만한 시각과 시야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내적이고 외적인 세계의 또 다른 가치를 드러내준다. p277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참 재미있다. 알렝드 보통은 프루스트를 꽤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아 물론 이렇게 얘기할 수 밖에 없다는 건 프루스트라는 작가가 쓴 책들을 인용했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2장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에 나오는 ‘프루스트 박사가 우리의 건강을 바꾸는 방법들’이다. 요통, 코르셋, 운동 각각에 해당하는 프루스트 박사의 설명과 그것을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보여주는 그림은 정말 놀랍다. 그리고 재미있다. 때로 알랭드보통이 설명하기 위해 들어가는 실제 인물들의 사진도 글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보통은 4장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에서 ‘유대인 어머니의 문제’, ‘거북한 욕망’, ‘데이트의 문제들’, ‘낭만적 비관주의’, ‘연극계 경력의 실패’, ‘친구들의 몰이해’등을 프루스트의 일상적 사건들에서 그가 겪었을 고통들을 찾아냈다. 이 외에도 프루스트가 고통 받았던 목록들은 천식, 식단, 소화, 바지, 과민성 피부, 쥐, 추위, 고도에 대한 민감성, 기침, 여행, 등을 프루스트의 말 한마디 혹은 그가 적은 상황에서 알랭드 보통은 세심하게 찾아내고 관찰하여 쓰고 있다. 사실 각각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별 것 아닌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재미있다.

특히 고통받는 방법을 설명한 이 장에서는 프루스트 뿐만 아니라 프루스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제1번환자, 문제, 문제에 대한 대응법, 그리고 더 나은 해결책까지. 이 네가지 포맷으로 이루어지는데. 정말 웃기다. 이건 아마도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가상의 인물이라서 더 재미있는 것 같다. 특히 ‘더 나은 해결책’은 알랭드 보통의 위트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6장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에서는 프루스트가 주변 친구들에게 받은 평가와 프루스트가 생각하는 우정의 정의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책에 몰입하게 된다.

9장 책을 내려놓는 방법에서 책, 독서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독자의 다섯가지 증상은 정말 이 책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다. 이 증상들이 이상하게도 묘하게 설득이 된단 말이지. 이것이 바로 프루스트의 힘인 것 같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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