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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책 이야기

10.난중일기 – 이순신, 임진년 아침이 밝아 오다

by 신치 2011. 6. 7.

1.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
이순신은 1545(인종 원년) 3 8, 조선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청소년기에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대대로 문신집안 출신인데 반해 이순신은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에 무과에 응시하였다. 첫번째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해 다리에 부목을 대고 끝까지 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국 낙방하고 말았다. 4년 뒤인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설 수 있었다. 1579년 봉사, 1586년에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었다. 1587년 당시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막고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절도사 이일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였다.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맞아 싸워 포로 60명을 탈환했으나, 녹도도 병영이 와해되었다. 이로 인해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 이순신은 무기 없이 혼자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이일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서 모함한 연유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 , 이일은 자신의 죄를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이후 이순신은 순변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를 꾀어내어 잡아 죄를 사면 받게 된다. 이순신은 주변 동료들로부터 추천을 받아 매우 빠른 진급을 계속해서 하게 된다. 1589년에는 관직에 오른 지 14년만에 정읍현감이 되었고, 고을을 다시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 8월에는 종3품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삼으려 했으니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그러나 1591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었다. 이후에도 많은 신하가 이순신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해 실태를 파악하고,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의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1598 11 19일 노량해전 중 일본군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쓰러진다. 전사하는 순간에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전사 직후에는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엇다. 한참 후에는 충무공이순신전서도 제작 되었는데, 이것은 정조 19(1795)에 발간된 이순신의 유고 전집이다. 정조의 왕명에 따라 1793년부터 3년에 걸쳐 이순신의 옛날 행적 및 유고를 모아 규장각의 윤행임이 편찬, 예문관 검서관 유득공이 교정을 맡아 교서관에서 발간하였다. 14 8책의 활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사한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이순신 정신이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에 대한 학술 세미나가 열리는 등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이순신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들-탄신기념 행사, 거북선 축제, 충무공 위토 모내기 행사 등등-을 후손들이 이어가고 있다.

충무공의 명언들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勿令妄動 靜重如山) (1592 5 7.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경상좌우도 수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포심과 전쟁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지라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칠천량해전 이후 충무공이 다시 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고 수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 다였다. 그러자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임금의 밀지가 떨어졌고, 충무공은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9 15일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내며.)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아무리 좌수사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나라의 물건을 마음대로 자를 수 는 없다." (전라 좌수사가 객사에 사람을 보내어 거문고를 만들 오동나무를 찍어 오라고 고흥지방의 만호인 이순신에게 청하자 이렇게 말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

<난중일기>를 통해 만난 이순신은 전장에서도 끊임없이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지극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자녀들과 부인에 대한 걱정도 만만치 않은 것을 보아서는 가족들에게도 굉장히 따뜻하고 자상한 가장일 것 같다. 하지만 엄청나게 걱정을 함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계속 가지고 전장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가족사랑보다 훨씬 큰 것은 아마 애국심이 아닐까 싶다. 권력을 남용하여 아랫사람에게 체벌을 하는 등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약속 시간 지키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주의자이다. 간간이 보이는 쉬면서도 군량이나 배 정비 등에 대해 챙기는 것을 보면 준비성도 굉장히 철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전장의 분위기를 헤이하게 만들거나 술주정등으로 자기 관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군인데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는 꽤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가진 것을 병사들과 나눌 줄 아는 성품도 가지고 있고, 정직함을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랫사람들이 거짓말 하는 것을 못 견딜 정도로 싫어하는 것 역시 일기에 그대로 묻어난다. 원균에 대한 비판이 자주 보이는데 이순신은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뚜렷한 사람인 것 같다. 특히 본인이 아무리 가족을 생각해도 일을 우선적으로 살았듯이 본인과 같이 일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개인적인 일들을 우선적으로 하는 행위를 굉장히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음을 여러 번 보임으로써 꽤 신중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까탈스러운 성격이었것 같다. 하지만 난중일기의 전반에 걸쳐 받은 느낌은 이순신장군은 사람과 동물까지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귀하게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가진 신념과 원칙을 평생을 통해 지키고 그것을 실천하고, 꾸밈없고 솔직하고 꾸준한 모습을 주변 이들에게 보여주었기에 늘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수식어가 이것저것 붙은 이순신장군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알 수 있는 책이었다.

<참고자료>

1)     Ko.wikipedia.org/wiki/충무공이순신전서

2)     Ko.wikipedia.org/wiki/이순신

3)     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

4)     www.dragon5.com/news/news20040905.htm 충무공의 명언들

5)     http://opentory.joins.com/images/6/64/%ec%9d%b4%ec%88%9c%ec%8b%a0(%ec%b6%a9%eb%ac%b4%ea%b3%b5).jpg 이미지 다운로드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3.
  
내가 저자라면

1)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

-       주석이 본문의 옆에 있어서 읽기가 매우 편하다.

-       일기에 나오는 장소들을 실제로 사진으로, 전투 당시 상황을 그린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참 좋았다.

-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은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 난중일기를 보면서 이순신의 일기를 훔쳐본다는 느낌 때문에 약간은 흥미진진하다.

-       일기의 중간중간에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림 또는 사진들과 해석들이 일기를 읽는 흐름을 방해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할 수 있는 글을 덜 지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서 좋은 것 같다.

-       일기가 쓰여진 본문 중간중간에 당시 생활을 알 수 있는 민화들이 나오는데, 특히 김홍도의 그림을 보니 왠지 나도 모르게 반가웠다.

2)    읽으면서 아쉬웠던 부분

-       사진과 그림들이 컬러사진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       한자로 썼을 난중일기를 해석한 책이라서 그런지, 모르는 단어가 중간중간에 너무 많아서 사전 찾아 보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내가 무식한 탓도 있겠지.;;)

-       일기가 너무 짤막짤막하다. 전쟁 중이고, 이것저것 신경쓰고 해야 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일기를 쓰는 시간이 많진 않았겠지만, 상황에 대한 묘사나 감정의 표현 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읽는 사람 입장에서 무미건조했달까.

3)    내가 저자라면

내가 전쟁 중에 일기를 썼다면, 어땠을까? <난중일기>를 쓰면서 빠짐없이 나오는 부분은 날씨이다. 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에게 날씨는 정말 중요한 정보였을 것 같다. 날씨에 의해 변화되는 상황들-적들의 태도, 병력의 진로 등-이 꽤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린날은 유독 자세히 날씨를 묘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날씨로 인해 느껴지는 안타까운 감정이었으리라. 그리고 많이 보이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누가 찾아왔고, 누구랑 활쏘기를 했고, 누구와 술을 마셨고, 누군가 때문에 화가 났고, 누구에게  형벌을 주었다는 등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거의 매일 빠짐없이 적은 것을 보면, 이순신이라는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를 꽤나 중요시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였다면, 매일 있었던 사건들 중 나에게 깨달음이나 영향을 특별히 미친 것들이나 내 감정의 상태를 중심으로 일기를 썼을 것 같다. 그래서 이순신처럼 거의 매일 습관처럼 일기를 쓸 수 있진 못했을 것 같다.(물론 매일-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사건이나 감정의 상태-기록으로 남길만한-였다면 남겼겠지만 말이다.) 매일매일 짤막하게 적는 것보다 무언가 큰 일이 있을 때 한 번씩 왕창 적어 내려갈 것 같다. 물론 매일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엔 일기를 거의 쓰지 않는데, 예전에 일기를 거의 매일 썼던 때를 떠올려 보면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시기였다. 너무 힘든데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때. 그 때에는 그 날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과, 그 사이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 속에서 이렇게 해야지혹은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들을 주로 적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늘 희망의 메시지를 적었었다. ‘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말자. 파이팅!!’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마 나도 이순신처럼 난중일기를 썼다면, 위와 같은 식으로 썼을 것이다. 매일매일 내게 파도처럼 수없이 밀려드는 사건들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거품처럼 흩어지는 다양한 감정들을 쏟아내고 또 다시 새로운 파도로 다가올 수 있는 힘을 재생시키기 위한 용도로 말이다.

<난중일기>를 쓰는 이순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일기를 꾸준히 쓸 때의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힘들고 외로운데 어느 누구에게조차 기댈 수 없고, 오롯이 혼자 우뚝 서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을 것 같다. 그런 감정들을 쏟아버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그가 몇 글자라도 적었던 일기였을테고, 본인에게는 무척이나 큰 위로가 되었을 것 같다.



2011/06/07 - [신치.미나의 일상/칼럼] - 10.이순신이 사람을 얻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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