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저자에 대하여 – 이순신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3월 8일, 조선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청소년기에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대대로 문신집안 출신인데 반해 이순신은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에 무과에 응시하였다. 첫번째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해 다리에 부목을 대고 끝까지 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국 낙방하고 말았다. 4년 뒤인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설 수 있었다. 1579년 봉사, 1586년에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었다. 1587년 당시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막고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절도사 이일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였다.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맞아 싸워 포로 60명을 탈환했으나, 녹도도 병영이 와해되었다. 이로 인해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 이순신은 무기 없이 혼자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이일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서 모함한 연유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 즉, 이일은 자신의 죄를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이후 이순신은 순변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를 꾀어내어 잡아 죄를 사면 받게 된다. 이순신은 주변 동료들로부터 추천을 받아 매우 빠른 진급을 계속해서 하게 된다. 1589년에는 관직에 오른 지 14년만에 정읍현감이 되었고, 고을을 다시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에는 종3품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삼으려 했으니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그러나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었다. 이후에도 많은 신하가 이순신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해 실태를 파악하고,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의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중 일본군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쓰러진다. 전사하는 순간에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전사 직후에는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엇다. 한참 후에는 충무공이순신전서도 제작 되었는데, 이것은 정조 19년(1795년)에 발간된 이순신의 유고 전집이다. 정조의 왕명에 따라 1793년부터 3년에 걸쳐 이순신의 옛날 행적 및 유고를 모아 규장각의 윤행임이 편찬, 예문관 검서관 유득공이 교정을 맡아 교서관에서 발간하였다. 총 14권 8책의 활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사한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이순신 정신이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에 대한 학술 세미나가 열리는 등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이순신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들-탄신기념 행사, 거북선 축제, 충무공 위토 모내기 행사 등등-을 후손들이 이어가고 있다.
충무공의 명언들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勿令妄動靜重如山) (1592 년 5월 7일.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경상좌우도 수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포심과 전쟁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지라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칠천량해전 이후 충무공이 다시 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고 수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 다였다. 그러자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임금의 밀지가 떨어졌고, 충무공은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必死則生必生則死)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9월 15일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내며.)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아무리 좌수사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나라의 물건을 마음대로 자를 수 는 없다." (전라 좌수사가 객사에 사람을 보내어 거문고를 만들 오동나무를 찍어 오라고 고흥지방의 만호인 이순신에게 청하자 이렇게 말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
<난중일기>를 통해 만난 이순신은 전장에서도 끊임없이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지극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자녀들과 부인에 대한 걱정도 만만치 않은 것을 보아서는 가족들에게도 굉장히 따뜻하고 자상한 가장일 것 같다. 하지만 엄청나게 걱정을 함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계속 가지고 전장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가족사랑보다 훨씬 큰 것은 아마 애국심이 아닐까 싶다. 권력을 남용하여 아랫사람에게 체벌을 하는 등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약속 시간 지키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주의자이다. 간간이 보이는 쉬면서도 군량이나 배 정비 등에 대해 챙기는 것을 보면 준비성도 굉장히 철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전장의 분위기를 헤이하게 만들거나 술주정등으로 자기 관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군인데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는 꽤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가진 것을 병사들과 나눌 줄 아는 성품도 가지고 있고, 정직함을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랫사람들이 거짓말 하는 것을 못 견딜 정도로 싫어하는 것 역시 일기에 그대로 묻어난다. 원균에 대한 비판이 자주 보이는데 이순신은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뚜렷한 사람인 것 같다. 특히 본인이 아무리 가족을 생각해도 일을 우선적으로 살았듯이 본인과 같이 일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개인적인 일들을 우선적으로 하는 행위를 굉장히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음을 여러 번 보임으로써 꽤 신중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까탈스러운 성격이었것 같다. 하지만 난중일기의 전반에 걸쳐 받은 느낌은 이순신장군은 사람과 동물까지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귀하게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가진 신념과 원칙을 평생을 통해 지키고 그것을 실천하고, 꾸밈없고 솔직하고 꾸준한 모습을 주변 이들에게 보여주었기에 늘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수식어가 이것저것 붙은 이순신장군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알 수 있는 책이었다.
짤막짤막한 문장을 통해, 때로는 서정적인 시구를 통해 이순신 자신의 인간적 면모를 꾸밈없이 드러낸다.
한산섬 밝은 달에 새긴 이름, 이순신
이순신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로부터의 소식이 늦거나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순신은 종종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며 잠도 이루지 못했다.
이순신이 보살핀 것은 그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그의 군사나 동료, 궁핍한 백성들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영웅으로 불려진 데는 일을 함에 있어, 자기 몸을 보살피지 않고, 조금도 물러섬 없이, 그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미루지도,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자신도 공무를 마치면 수시로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활쏘기는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그대로 배 위에 앉아서 우후와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함께 새 봄의 경치를 즐겼다. p27
동헌에 나가 볼 일을 본 뒤 활 18순을 쏘았다. p28
이억기 : 이순신의 무고로 투옥되자 그의 구명 운동에 앞장섰으며
새로 쌓은 해자가 너무 많이 무너졌으므로 석수장이들에게 벌을 주고 나서 다시 쌓게 하였다. p31
배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직접 점검하고 그 길로 녹도진으로 갔다.
죄를 제대로 검사하지 못하니 쓴 웃음이 나왔다.
외톨이로 떨어진 섬이라 사방으로 적의 침입을 받을 터인데, 성과 해자가 몹시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p33
승군들이 돌 줍는 일을 게을리 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매를 때렷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전했다. 매우 다행스럽다. p34
혼자서 수색하였다고 하는데 그것도 겨우 반나절 만에 내나로도 외나로도 대평도 소평도를 모두 다 조사하고 그날로 돌아왔다고 보고하니 너무도 거짓이 심하다. p37
동래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바다라 그럴 리가 만무한데 말을 이렇게 꾸며 내니 그 간사함이 헤아리기 어렵다. p38
혼자 창가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p39
부산과 같은 큰 진이 벌서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늦게 활 5순을 쏘았다. p42
<이순신, 경상도를 구원하고자 노력하다>
모두 격분하여 제한 몸을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의로운 자들이라 할 만하다.
왜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죄다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모두 기꺼이 싸움터로 나갈 뜻을 가졌는데 낙안군수만 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했다. 한탄스러웠다.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잃는다면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조선 수군의 전선, 거북선과 판옥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적의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도망갔으므로 이를 잡아다가 목을 베어 내다 걸었다. p47
<육포, 합포, 적진포 싸움>
적들도 탄환과 화살을 쏘다가 기운이 떨어지자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에 내던졌다.
이어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 나와 군사들에게 나무를 하고 물도 긷게 하여 밤을 지내려고 하였다. p51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므로 사정이 안타깝고 포로가 될 것이 염려스러워서 데리고 다니겠노라고 하였더니, 어머니와 아내를 찾아야 하므로 다를 수 없다고 하였다.
놀라움과 분함이 극도에 달하여 하루 내내 서로 붙들고 오장이 찢어지듯 통곡하였다. p53
<이순신, 장계에 정상 우수사 원균을 언급하다>
<당포 싸움에서 패한 왜병>
맑다.
è매일의 일기에 거의 빠지지 않는 것이 날씨에 대한 언급이다. 아마 수군이라서 배를 타야하기 때문에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인 것 같다.
<당항포 싸움>
<한산도, 안골포 싸움>
방답 첨사 이순신도 왜의 큰 배 한 척을 잡고 왜적 머리 넷을 베었는데, 다만 활을 쏘아 죽이는 데만 힘쓰고 머리 베는 일은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p64
자정에 다시 달빛을 타고 배를 움직여 사천 모사랑포에 이르렀다.
새벽녘에 앉아 꿈을 생각해 보았다. p70
<부산 앞바다 싸움>
그것은 분명히 산에 올라 망보던 적들이 우리 수군을 보고, 위세에 놀라 배가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도망한 것입니다. p71
녹도 만호 정운은 변란이 생긴 뒤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솟구쳐서 적과 함께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세 번 싸움에 매번 앞장섰다.
여러 장수 중에서 따로 차사원을 정하여 각별히 정운의 초상 치르는 일을 맡아 보살피도록 하였다.
è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살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참 행복할 것 같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장계를 통해서 본 이순신의 1593년 1월>
피난민들에게 여수 앞바다의 돌산도에 들어가 살면서 농사를 짓도록 허락하여 달라는 장계도 올렸다. p80
그런데 전라 우수영의 우후가 술주정하며 마음대로 지껄여 대었다. 그 짓이 입에 담을 바가 되지 못하니 어찌 모두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p84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p87
새벽에 아산과 온양에 보낼 편지와 집에 보낼 편지를 함께 써서 보낸다. p88
아침을 먹은 뒤 수사 원균과 이억기가 같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마셨다. p91
<왜인 포로 송고로와 요사여문을 심문하다>
정해년에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와 일본어를 잘 아는 본영의 진무 공태원을 시켜서 그들이 하는 일과 탐망하는 방법에 대하여 하루 내내 포로들을 심문하였다. p93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우수사, 군관과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 부사도 모여서 군사 일을 약속하였다. p94
è당시에는 활을 쏘면서 군사 일등을 약속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지금의 사업가들이 골프 회동을 하면서 중요한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과 유사한 것 같다.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영산령이 취하여 넘어져서 정신을 못 차리니 우습다.
그가 속임수 쓰는 꼴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나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p98
그렇다고 정성으로 보낸 것을 되돌려보내는 것도 도리가 아닌 까닭에 군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편에 들으니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였다. 바로 답장을 써서 미역 다섯 다발과 함께 집으로 돌려보냈다. p99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동요하게 하였다. 진중에서도 속임을 쓰는 것이 이럴 정도이니 그 흉악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비가 계속 내려서 사람들의 바람을 흡족하게 채웠다. p101
è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순신이 꽤나 감성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나친 말이 많아서 쓴웃음이 나왔다.
원균이 송경락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쓰려고 하였으나 병사 ㅍ us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까,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하면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천 5백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
온 배에 비가 새지 않은 데가 없어 앉을 만한 마른 자리가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적은 날이 갈수록 더 흉학해지는데, 일마다 이 모양이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비가 하루 내내 내렸다. 마치 퍼붓는 듯하여 사람들이 머리조차 내밀기가 어려웠다.
è이런 날씨. 왠지 좋다. 비 오기 직전의 꾸물꾸물한 날씨도 좋다.
마음이 편하지 못하여 하루 내내 배에 누워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하여 정신이 없다고 핑계하면서 회답하지 않았다. p108
적의 무리가 많이 몰려들어 진주성 동문 밖에 모여 진을 쳤는데 날마다 큰 비가 내려 물에 막혀서 독을 품고 싸우고 있습니다. p113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잠시도 풀리지 않았다. 혼자 배를 덮는 뜸 밑에 앉으니 가슴속의 생각이 만 갈래나 되었다. p114
모든 배를 한꺼번에 출동시켜 견내량에 이르렀더니 적의 배가 부리나케 도망하였다. p115
광양의 적들은 진짜 왜적이 아니고 영남의 피난민이 왜적처럼 차리고 광양으로 뛰어들어 민간의 집들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p117
우리 옷으로 변장한 왜놈이 우리나라 작은 배를 타고 들어와 총을 쏘며 노략질해 가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p118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p120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하였다.
è어디가 불편한 걸까? 허리가 아픈가?
원 수사의 하는 말이 매우 흉악스럽고 속임이 있었다. 이와 같이 사리 분별이 없으니 일을 같이 한다고 해도 뒷걱정이 없을까? p121
원 수사가 흉악하게 속임수를 쓰는 것이 매우 꼴사나웠다. p122
새벽에 꿈에서 아들을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을 얻을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p123
è이순신장군은 무의식을 잘 알았을까? 꿈도 엄청 많이 꾸고, 그 꿈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또 원 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였는데 나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망령된 짓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p124
우수사가 청하였으므로 그 배에 갔더니 해남 현감이 술자리를 차렸다. 몸이 불편하여 겨우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식은땀이 때도 없이 흘러서 옷을 적셔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p126
몸이 매우 불편하여 혼자 배의 뜸 아래 앉아 있으니 가슴속에 품은 생각이 만 갈래로 일어났다.
달빛이 대낮 같고 물결이 비단결 같아서 가슴속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p127
<11,12월 이순신, 군병.군량.군기를 도모하다>
1594년 명일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월 이순신, 통제영에서 장계를 쓰다>
기운이 가물가물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했다. 하릴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셨다.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황득중이 들어왔는데, 문학 유몽인이 암행어사가 되어 흥양현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문서를 압수하였다고 했다. p140
수군을 거창에서 모집해 왔는데, 이 편에 들으니 원수가 방해하려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우습구나, 예로부터 남의 공을 시기함이 이러하니 한탄한들 어쩔 것인가!
소비포 만호로부터 경상도 여러 배들의 사부와 격군들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담하여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p141
미조항 첨사가 돌아간다고 보고하기에 평산포에서 도망친 병사 세 명을 끌어와서 딸려 보냈다.
이경복, 노윤발, 윤백년이 도망가는 군사를 싣고 육지로 빠져나가는 배 여덟 척을 붙잡아 왔다. p145
è전쟁통이라 그런지 힘들어서 도망가는 군사들이 꽤나 많았나보다.
우조방장이 도착하였는데 그 편에 난을 일으킨 자들의 소식을 들었다. 염려스러우면서도 분통이 터졌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웠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웠다. p147
바다 위에 뜬 달이 맑아서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p149
“바다 위에서 해를 넘기며 나라를 위해 수고하니, 내가 항상 잊지 않노라. 공을 세운 장병인데 큰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을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위에서 밤낮으로 애쓰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마움과 그리움이 끝이 없다.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들어가서 치면,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합니다. 잠시 늦추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면 기회를 보아 완전히 무찌르도록 서로 작정합시다.” p150
정종, 배춘복도 왔다. 장언춘의 천인 신분을 면제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좌조방장이 늦게 온 죄를 문책하였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 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p151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일 것이다. p152
또한 전선이나 수군을 보내지 않고 지체하는 여러 장수들을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도 올렸다. p153
<이순신, 당항포 싸움을 준비하다>
장흥 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져와서 하루 내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속 날짜를 어긴 여러 장수들을 처벌하도록 장계를 올렸다. p161
술이 세 차례 돌아가니 원 수사가 크게 취해 술주정을 하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마구 하니 순무어사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순무어사가 전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기에, 죽도 바다 가운데로 나가서 훈련하였다. p163
바둑을 두고 군사 일을 논의하였다.
혼자 배 뜸집 아래 앉아 있었으나 저녁 때까지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곤양 현감이 흠뻑 취하여 이따금 미친 소리를 내뱉으니 어처구니없다. 나도 잠깐 취하였다. p165
아침에 아들 면과 집안 계집종 넷, 관의 계집종 넷이 병을 간호하기 위하여 들어왔다. 덕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내일 돌려 보내라고 일렀다. p166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하였다. p167
저녁에 큰 비가 와서 밤새 지붕이 새어 마르지 않았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하는데 고생스러울까 매우 걱정이 되었다.
거제 장문포에서 사로잡혔던 변사안이라는 자가 탈출해 와서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변사안이라는 자가 탈출해 와서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하였다. p169
빗발이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싸움하는 군사들의 걱정이 어떠할까! p170
활쏘기를 하면서 하루 내내 술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p171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p172
저녁에 몸이 불편하여 밥을 두끼나 먹지 않았다. p176
원수가 자기가 한 말을 뉘우치면서 보냈다고 하니 우스웠다. p177
적 다섯 명과 도망한 군사 한 명을 함께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잔뜩 취하여 수루에 올라갔다. p178
혼자 앉아서 아들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p180
점이 꼭 맞았으니 절묘하다.
그러나 근심이 마음 한가운데 있으니 어떻게 조금이라도 편할 수 있을 것인가. p181
아침에 조카 해와 종경이 들어왔다. 면의 병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어찌 이보다 더 기쁠 수 있겠는가! p182
아침에 명나라 장수에게 예의를 표시하는 선물을 주었더니,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며 준 물건이 매우 풍성하다고 하였다. p184
저녁에 수루에 올라가서 밤까지 앉았다가 돌아왔다. p185
밤새 토하였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머리를 풀고 통곡하였다. 이것은 매우 길한 징조라고 한다. p186
초하루 한밤중 꿈에 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계산해 보니 낳을 달이 아니므로, 꿈에서도 쫓아 버렸다. p187
è무의식에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있으면서, 본인의 부인과 첩들이 다른 사내와 정분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었나보다. (ㅋㅋㅋ)
경상 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 여자들을 시켜 떡을 이고 오게 하였다는 일 때문에 벌을 주었다. p188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이 없어서 바다는 잔잔하였다. p190
교서에 절한 뒤 원수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오해가 많이 풀어지는 기색이었다. 원수가 원 수사를 심하게 꾸중하니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가소로웠다. p191
원수가 올린 장계 때문에 문책하는 글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급히 올린 장계에서 오해가 많았던 듯하다.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한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
원 수사의 일은 놀랍기 그지없다. 내가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천 년을 두고 한탄할 노릇이다.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p195
소비포 권관이 달밤을 타고 자기 진포로 돌아갔는데 그 가닭이 원 수사가 자꾸 모함하려 하기 때문이다. p196
어제 마신 술이 아직 안 깨어 방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뜻이 자못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었다.
우수사가 오겠다고 미리 약속하고도 병을 핑계 대고 오지 않으니 한심스럽다. p197
모두들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왜놈이 화평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을 타고 천천히 갔는데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저물 무렵에 여러 장수에게 뛰어넘기를 하게 하고, 군사들에게는 씨름을 겨루게 하였다. p198
è그와 함께 하는 장수와 군사들을 끊임없이 훈련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저녁이 지나 복춘이 와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닭이 운 다음에야 돌아갔다. p199
적의 무리가 험난한 곳에 웅크리고는 나오지 않았다. 누각을 높이 세우고 양쪽 봉우리에 보루를 쌓고는 도무지 나와서 대항하려 하지 않았다.
빈 배만 깨뜨려 불태웠다. p200
적들은 두려워서 나와 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호응하니 적이 갈팡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이리저리로 급히 달아났다. p201
원 수사가 속임수를 썼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였다. 아주 놀라웠다. 원균도 왔는데 그 흉측한 모양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p204
견내량에서 제못대로 방어선을 넘어가서 고기잡이를 한 사람 24명에게 곤장을 때렸다. p207
버리고자 하여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부모가 죽은 후에 남은 자식들이다. 남은 아이 셋은 끝내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p208
“국가가 위험한 때를 당하여 무거운 책임을 맡았다면서 어찌 보답할 마음은 가지지 않고, 음탕한 여자를 거느린 채 관사에는 들어가지 않고 성밖 집에 멋대로 거처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니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각 고을과 진포의 수군에게 육전에서나 쓸 군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 바쁘니, 이 또한 무슨 이치인가?” 한바탕 꿈이었다. p210
1595년 휴전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전쟁은 뜸했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다가올 싸움에 대비하였다.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준비하고 배와 무기를 만들고 개비하였다. 활쏘기를 하면서 단련하기도 하였다. 아직 웅천 등지에 웅크리고 있는 적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항상 경계하였다. p211
우우후, 거제 현령, 금갑도 만호, 소비포 권관, 여도 만호 등이 찾아왔다. p213
è이순신에게는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많은 사람들은 과연 그의 인간성을 보고 찾아오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권력을 보고 찾아오는 것일까? 갑자기 든 의문.
몸이 불편하여 누워서 끙끙 앓았다.
è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아팠던 것일까? 이렇게 아픈데도 그를 전장에 계속 머무르게 한 동인은 과연 무엇일까?
늦게 활 10순을 쏘고 헤어졌다.
약속한 날짜를 어긴 죄로 처벌하였다.
조금 있다가 여도의 배에서 불이 났는데 광양, 순천, 녹도의 배까지 옮겨 붙어 네 척이 불탔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p215
순변사 이일이 하는 짓이 아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를 해치려고 애를 쓴다고 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p216
원균이 포구에서 교대하려고 도착하였기에 수사 배설이 교서에 절하라고 하였는데 불평하는 기색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여러 번 타이른 뒤에야 억지로 행하였다고 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 p219
밥을 먹은 뒤 조형도가 돌아가겠다고 했다. 늦게 활쏘기를 하였다. p221
수사 이계훈이 실수로 불을 내고는 자신은 물에 빠져 자살하고, 군관과 사공 모두 1백 40여명이 타 죽었다고 하였다. p222
늦게 침도에 이르러 우수사, 배 수사와 함께 활쏘기를 하였다. 여러 장수도 모두 들어와서 참여하였다. p224
è이것이 이순신의 리더십이 아닐까? 그는 말로만 사람들을 시키고 이끌기보다는 본인이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끔 만들었던 것 같다.
망기시로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죽으러 나왔다. 참 지독한 놈이었다. p226
아들 회와 해가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매우 다행이다. p229
è가족을 끔직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이순신만큼이나 먼 전쟁터에 있는 아버지를 위해 꾸준히 다녀가는 아들들을 보니, 그에 대한 자녀들의 효심도 이순신 장군이 그를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대단한 것 같다.
활을 20순 쏘았는데 많이 맞혔다.
혼자 대청 가운데 앉았으니 가슴속에서 갖은 생각이 만 갈래로 갈라진다.
사도 첨사가 와서, 흥양 현감이 받아 끌고 간 배가 돌섬에 걸려 부서졌다고 보고하였다. 그래서 대장 최벽과 십선장, 도훈도를 잡아다가 곤장을 때렸다.
è그가 곤장을 친 이유는 단순히 배가 부서졌다는 사실보다는 이미 고도로 훈련된 선장들이 배를 부술만큼 훈련을 게을리하거나 정신을 차리지 않은 것에 대해-전쟁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곤장을 친 것이 아닐까?
아내가 불이 난 다음에 크게 상처를 받았고 담과 기침도 심하다고 한다. 매우 염려스러웠다.
쇳물을 부어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만들었다. p231
è이순신 장군은 못하는게 뭐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배도 만드는데 가마솥 하나 정도는 우습지 아니한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 좀 놀랍다. 전쟁터를 이끄는 장군이 가마솥을 만든다는 것? 왠지 상상만 해도 웃긴다.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햇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p233
è너무 겸손한거 아니냐며…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진실된지 어떤지 살펴보았으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잠시 그 하는 짓을 보기로 하고 공문을 작성하여 주었다. p234
구순 노인이 이렇게 위독한 얻으셨으니, 근심스러워 눈물이 흘렀다. p235
음탕한 여자 12명을 붙잡아서 그 대장과 함께 죄를 주었다. p238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다. 슬픔에 젖어 생각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p239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군들 팔을 걷어붙이고 마음을 썩이면서 원수의 살점을 저미고 싶지 않겠는가!
군율로 다스려도 아까울 것이 없거늘, 관대하게 용서하고 돈독하게 타일렀다. 그런데도 마음을 단정히 하기는커녕 고집을 더욱 심하게 부려서 스스로 죄 구덩이로 빠지니, 나는 매우 놀랍고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p240
군량이 떨어졌다는 말을 많이 하였으나 달리 계책이 없었다. 매우 걱정스럽다. 박 조방장도 왔는데 술 몇 잔을 마시고 아주 취하였다. p241
è난중일기에 유독 많이 보이는 부분 중에 하나가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다. 이순신 장군은 그가 받는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나 보다.
체찰사와 만나 조용히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는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이 잇는 것 같았다. 호남 순찰사가 헐뜯으려 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p247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또 이별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p251
항복한 왜인 여덟 명이 가덕도에서 나왔다고 전하였다.
항복한 왜인 여덟 명과 그들을 데리고 온 김탁 등 두 명도 같이 왔기에 술을 먹었다. 김탁 등에게는 각각 무명 한 필씩 주어 보냈다. p259
è잘 한 군사들에게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보상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따랐나보다.
해와 분이 무사히 본영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니 기뻤다. 그러나 그 고생스러웠던 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랴. p261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오늘은 나라의 제삿날이다.
è갑자기 궁금해지는 것. 이렇게 많은 옛날 왕조의 제사날들을 지금도 챙기고 있을까?
아침 일찍 항복한 왜인 다섯 명이 들어왔다. 항복한 까닭을 물으니 저희 장수의 성질이 포악하고 일도 너무 고됐기 때문에 도망 나와서 항복했다고 하였다.
è이순신 장군과 함께 했던 군사들 중에 도망친 군사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도망 간 것이었을까? 그들은 항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고된 훈련이 힘들었을 것 같긴하다. 아마 이순신장군만큼이나 가족들이 그립고 보고 싶어서 도망친 것 아닐까?
오수가 잡은 청어 3백 60두름을 하천수가 실어 갔다. 여러 곳의 공문을 처리하여 나눠 보냈다.
è혼자 먹을 수도 있는데, 매번 정직하게 본인이 받은 것들을 나누는 이런 성품 때문에 그를 찾는 이들이 많았을 수도 있겠다.
어제 저녁에 종 금이를 본영으로 보냈는데, 바람이 아주 거칠어서 몹시 염려되었다.
è당시 계급관계 안에서 종도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이라니, 이순신은 정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가보다.(당연한건가?;;)
오후 2시쯤에 메주 만드는 것을 끝내서 온돌에 넣었다.
è이 사람은 도대체 뭔가… 가마솥에 이어 메주까지? 지금으로 다지면.. 일등 신랑감??ㅋㅋ
웅천 현감 이운룡이 손인갑과 좋아 지내던 여인을 데려 왔기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야금 몇 곡조를 들었다.
우수사의 편지가 왔는데 약속한 날짜를 뒤로 늦추자고 하였다. 가소롭고도 한심스러웠다.
è약속시간을 안 지키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다.
늦게 동헌에 나가서 음식을 풀어 군사들에게 먹였다. p275
아침밥을 먹은 뒤 관청에 나가서 강진 현감이 약속한 날짜를 어기고 늦게 온 죄를 다스렸다.
얼마 뒤 강진 현감이 보러 왔기에 위로하고 술을 주었다. p277
è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다스리되, 그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 이것 역시 이순신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방식인 것 같다.
봄철의 노곤한 증세가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들이 떠나간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하였다. 봄기운이 사람을 괴롭혀 몹시 피곤하였다. p278
부안에서 보내 온 술을 마셨다. p279
è역시 술을 좋아하니 술 선물도 각 지방에서 엄청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여도 만호와 흥양현감이 와서 수영의 서리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털어놓았다.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또 전라도 수군 가운데 우도의 수군은 좌도와 우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도와주라는 명령도 잇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다.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 나라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떻게 할 것인가. p281
수사가 자기 부하를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복병하는데 분한 목소리로 떠들어 대니 매우 가소로웠다. p282
è불만을 토로하고 비판만을 일삼는 목소리를 싫어하는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우수사를 만나 잘못된 점을 다시 말하였더니 우수사는 모든 것을 사과한 다음 술을 내어 함께 마셨다.
è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모양이다. 직언을 하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잇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복이다.
우수사는 취해 쓰러져 작별 인사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으므로 그냥 오게 되어 어처구니없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정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p284
저녁 때 방답 첨사가 화낼 일도 아닌데 화를 내면서 지휘선에서 물 긷는 일을 하는 군사에게 곤장을 때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방답의 군관과 이방을 붙잡아들여 군관은 20대, 이방은 50대의 곤장을 때렸다. p285
è내 속이 다 시원하다. 어이없는 비판과 폭력에 대하는 이순신의 자세.
아침에 새로 만든 가야금에 줄을 매었다. p288
è가마솥, 메주에 이어 가야금까지 만든다.. 이 사람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싶다. 팔방미인?? ㅋㅋㅋ.. 예술적인 감수성까지 갖췄다니 너무 완벽한 거 아닌가?
수루에 기대어 저녁 나절을 보냈는데 마음이 언짢았다. 머리를 꽤 오랫동안 빗었다. p290
선인암으로 가서 하루 내내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두워져서야 서로 작별하였다.
è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김 조방장이 와서 노천기가 술을 먹고 망령을 부리다가 본영 진무 황인수, 성복 등에게 욕을 당하였다고 하므로 곤장 30대를 때렸다.
è술 먹고 주정 부리는 것을 정말 싫어했던 모양이다.
늦게 군사들 중에서 힘센 사람을 뽑아서 씨름을 시켰더니, 성복이란 자가 가장 뛰어났으므로 상으로 쌀 한 말을 주었다. p294
울과 김대복이 같은 배를 타고 나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앉아서 걱정을 했다. p297
윤연이 자기 진포로 간다고 하기에, 도양장의 종자콩이 부족하거든 김덕록에게서 가져가라고 공문을 보냈다. p301
è이 분. 오지랖도 넓다.ㅋㅋㅋ
통신사가 탈 배에 자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그 말 속에는 우리 것을 빌어 썼으면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p307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바깥 도둑을 없애지 못한 이때, 안에서도 도적이 일어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è원래 전쟁 시에 바깥도 문제지만, 바깥에 신경 쓰느라 힘들어하는 국민들 사이에 흔히 생기는 문제 아닌가?
아들 회가 방자 수를 곤장 때렸다기에 회를 관청 뜰 아래로 불러다가 잘 타일렀다. p309
è아마 그의 부하였으면 당장 곤장을 쳤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가보다. 이순신도 본인의 자녀에게는 관대해질 수 밖에 없나보다.
종 경이 병을 앓았다. p310
아침에 우가 곤장을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사 지낼 물건을 약간 보내 주었다. p314
자식들에게 활쏘기를 시키고 말을 달리면서 활 쏘는 것도 연습시켰다. p316
우선 전선 정비하는 일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p319
원균이 흉한 짓을 하였으나 여기에 적지 않겠다. p321
è이제 원균에 대한 애증조차 남아 있지 않았나보다.
내 몸도 피곤하고 말도 고될 것 같아서 함평에 머물러 잤다.
è인간에 이어 이제 동물사랑까지..(물론 동물 사랑하면서 타고 다니는 것은 좀 그렇긴 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ㅎ) 이순신 장군은 정말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관직은 파직되고 서울로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약 한 달 만에 특사되어 고향 아산을 거쳐 초계로 내려와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7월에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함에 따라 8월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p329
<이순신,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경기 체철사의 아병인 이름도 모르는 자의 집에서 잤다. 신복룡이 우연히 여기에 왔다가 내가 온 것을 보고는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황천상은 내 짐이 무겁다며 말을 내어 실어 주었다. 고맙기 짝이 없다. p334
홍 찰방, 이별좌, 윤효원이 보러왔다.
동네 사람들이 각기 술병을 들고 와서 멀리 떠나는 길을 위로하였다. 인정상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나는 노래를 들어도 즐겁지가 않았다. 금부도사는 술을 잘 마시는데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p335
조금 잇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전경복이 매일같이 정성을 다해서 상복 만드는 일들을 돌봐 주니 슬픈 가운데서 감사하여 무슨 말을 할 것인가. p337
나는 기력이 다 바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공주 정천동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 이산에 들어가니 고을 수령이 극진히 대접하였다. p338
밤중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슬픈 마음을 어지 견딜 수 있으랴!
판관 박근이 보러 왔고, 부윤도 후하게 접대해 주었다. 판관이 비 올 때 쓰도록 기름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 등으 보내 주었다. p339
또 안부도 묻는데 위문하는 말이 매우 극진하였다.
정사준도 달려왔는데 원균이 망령되고 못된 짓을 하였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p340
병사 이복남이 아침 전에 보러 왔는데 원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진흥국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흘리며 원균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p341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 할 따름이다. p342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어찌 빨리 죽지 않는가? p343
안괄이 구례에 갔을 때 수절을 하고 있는 조사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매우 놀랍다.
(음흉한 원균이 저지른 일) “그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팔아 오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처를 겁탈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악을 쓰면서 말을 듣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p344
현감이 점심을 냈는데 매우 풍성하였다. 대단히 미안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아침에 술에 취해 날 뛰니 매우 밉살스러웠다. p347
음흉한 사람 원균은 무고하는 짓이 매우 많지만 하늘이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하겠습니까?
본시 안흥제는 죽을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여러 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뇌물을 바친 다음에야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p348
거절할 수 없어서 대강 그려 보냈다. p349
황생원이라고 하는 일흔 살이나 되는 노인이 하동에 왔는데 원래는 서울 사람이지만 지금은 떠돌아 다닌다고 하였다. 나는 만나지 않았다. p350
처음으로 노마료를 받았다. p353
아들 열과 이원룡을 불러들여 책을 매어서 변씨 족보를 쓰게 하였다.
수군 여러 장수들은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므로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p357
아침에 초계 현감이 연포를 끓여 가지고 와서 권하였는데 오만한 빛이 역력했다. 그의 처사가 예를 잃었음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p359
è역시, 착한 일 남을 위하는 일을 하더라도 너무 티내면서 하면 안된다. 항상 겸손의 미덕미 필요할 듯.
아침에 이방이 보러 왔기에 밥을 먹여서 보냈다. p364
홍우공은 아버지의 병을 구실로 종군하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 팔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었다. p366
두메에 박혀 사는 사람이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 또한 소박하고 인심이 후한 모습이다. p367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소. 하였다. p369
저녁 때 배흥립의 병을 보러 갔더니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다. 매우 걱정스럽다. p372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 옥과현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로 길이 가득 찼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위로하며 달랬다.
관청과 창고는 이전처럼 무사하였으나, 병기 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채 병사들이 달아나 버린 뒤였다. p376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잇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p377
늦게 배설이 적이 많이 몰려올까 두려워 도망가려고 하기에 그 관하의 여러 장수들이 데려오려고 하였다. 나도 그 속마음을 잘 알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표하는 것은 장수로서 택할 방법이 아니어서 참고 있었다. p380
추위가 스며들어서 사람을 괴롭히니, 사공들이 매우 걱정스러웠다. p381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들이 또 어디 있으랴. p383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하였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웅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p386
명랑해전 대첩비 1688년에 세운 비로 비문에는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에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을 무찔렀다고 쓰여 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p387
우우후 이정충이 배에 왔으나 그를 만나 보지 않았다. 그는 도망하여 바깥 섬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p391
우수사가 군량선에 탄 사람을 붙들어다가 무릎을 몹시 때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아침에 우수사가 아랫사람의 무릎을 친 일은 잘못되었다고 사과하였다. p392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 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p395
남언상은 본래 수군에 소속된 관원인데, 제 몸만 보존하려는 계책으로 수군에 오지 않고 몸을 산골에 숨긴 지 달포가 넘더지 이제 적이 물러간 뒤에야 무거운 벌을 받을까 겁내어 비로소 나타났다. 그 하는 짓이 매우 해괴하다. p396
밤 자정께 면이 죽는 꿈을 꾸고는 목 놓아 울었다. p401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그리고 11월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달아나는 적을 쫓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 고금도로 진을 옮기고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다>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기를 “유 제독이 달아나려고 합니다.” 하였다. 분하다, 분하다! 나랏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p415
곧 도독과 약속하고 수군을 거느리고 쫓아 나갔더니 왜선은 움츠러들어 하루 내내 나오지 않았다. p416
3.내가 저자라면
1)읽으면서 좋았던 부분
-주석이 본문의 옆에 있어서 읽기가 매우 편하다.
-일기에 나오는 장소들을 실제로 사진으로, 전투 당시 상황을 그린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참 좋았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은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 난중일기를 보면서 이순신의 일기를 훔쳐본다는 느낌 때문에 약간은 흥미진진하다.
-일기의 중간중간에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림 또는 사진들과 해석들이 일기를 읽는 흐름을 방해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할 수 있는 글을 덜 지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서 좋은 것 같다.
-일기가 쓰여진 본문 중간중간에 당시 생활을 알 수 있는 민화들이 나오는데, 특히 김홍도의 그림을 보니 왠지 나도 모르게 반가웠다.
2)읽으면서 아쉬웠던 부분
-사진과 그림들이 컬러사진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한자로 썼을 난중일기를 해석한 책이라서 그런지, 모르는 단어가 중간중간에 너무 많아서 사전 찾아 보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내가 무식한 탓도 있겠지.;;)
-일기가 너무 짤막짤막하다. 전쟁 중이고, 이것저것 신경쓰고 해야 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일기를 쓰는 시간이 많진 않았겠지만, 상황에 대한 묘사나 감정의 표현 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읽는 사람 입장에서 무미건조했달까.
3)내가 저자라면…
내가 전쟁 중에 일기를 썼다면, 어땠을까? <난중일기>를 쓰면서 빠짐없이 나오는 부분은 날씨이다. 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에게 날씨는 정말 중요한 정보였을 것 같다. 날씨에 의해 변화되는 상황들-적들의 태도, 병력의 진로 등-이 꽤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린날은 유독 자세히 날씨를 묘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날씨로 인해 느껴지는 안타까운 감정이었으리라. 그리고 많이 보이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누가 찾아왔고, 누구랑 활쏘기를 했고, 누구와 술을 마셨고, 누군가 때문에 화가 났고, 누구에게형벌을 주었다는 등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거의 매일 빠짐없이 적은 것을 보면, 이순신이라는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를 꽤나 중요시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였다면, 매일 있었던 사건들 중 나에게 깨달음이나 영향을 특별히 미친 것들이나 내 감정의 상태를 중심으로 일기를 썼을 것 같다. 그래서 이순신처럼 거의 매일 습관처럼 일기를 쓸 수 있진 못했을 것 같다.(물론 매일-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사건이나 감정의 상태-기록으로 남길만한-였다면 남겼겠지만 말이다.) 매일매일 짤막하게 적는 것보다 무언가 큰 일이 있을 때 한 번씩 왕창 적어 내려갈 것 같다. 물론 ‘매일’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엔 일기를 거의 쓰지 않는데, 예전에 일기를 거의 매일 썼던 때를 떠올려 보면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시기’였다. 너무 힘든데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때. 그 때에는 그 날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과, 그 사이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 속에서 ‘이렇게 해야지’ 혹은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들을 주로 적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늘 희망의 메시지를 적었었다. ‘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말자. 파이팅!!’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마 나도 이순신처럼 난중일기를 썼다면, 위와 같은 식으로 썼을 것이다. 매일매일 내게 파도처럼 수없이 밀려드는 사건들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거품처럼 흩어지는 다양한 감정들을 쏟아내고 또 다시 새로운 파도로 다가올 수 있는 힘을 재생시키기 위한 용도로 말이다.
<난중일기>를 쓰는 이순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일기를 꾸준히 쓸 때의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힘들고 외로운데 어느 누구에게조차 기댈 수 없고, 오롯이 혼자 우뚝 서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을 것 같다. 그런 감정들을 쏟아버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그가 몇 글자라도 적었던 일기였을테고, 본인에게는 무척이나 큰 위로가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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