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소설가,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조이스는 더블린 중심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라스가의 브라이턴 서부 스퀘어에서 정치에 관심이 높으나 직업적으로는 사회 밑바닥을 전전한 아버지 존 스태니스라우스 조이스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10명의 자녀들을 가톨릭 신앙에 따라 키우고자 노력한 어머니 제인 머래이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났다. 대학 교육을 마칠 때까지는 가톨릭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철저하고 경건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와 달리 호탕하고 열정적인 기질로 술을 좋아하고 무분별한 성격으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무척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조이스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의 작품에 등장인물들이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존재라고 밝힌 바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범생이었던 조이스는 사춘기와 동시에 가족과 학교에 거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또한 종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 되어,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사제의 길은 뒤로한채, 그가 뛰어난 소질을 보이기 시작한 문학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대학졸업 후 초등학교 임시교사로 있던 1904년 6월 16일은 그가 노라 바나크르와 첫 데이트를 한 날로, 그의 최대 걸작인 <율리시스>의 배경 날자가 되어 문학사에 영원히 기억되는 블룸스 데이가 된다. 이 날이면 조이스의 애독자들이 더블린에 모여 블룸의 행로를 되집으며 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그녀와 조이스는 유럽으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고, 예술가로서의 그의 삶이 시작된다. 1920년 파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많은 작품을 썼다. 2차 대전 발발 후 취리히로 피난을 갔다가 1941년 1월 13일에 급사하게 된다. 그의 유명한 소설은 <율리시스>, <피네간의 경야>, 20세기 초 더블린 사람들의 냉소적이고 우울한 모습, 그리고 당시의 각박한 사회상을 그려낸 <더블린 사람들>, 그리고 반자전적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이 있다. 특히 호머의 <오디세이아>를 연상시키는 <율리시스>는 하루 동안의 더블린 방황기를 보여주는데, 다채롭고 치밀한 문장과 문체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문장의 마술사, 문체의 마술사라 불리었던 조이스를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모더니즘의 씨앗을 뿌린 조이스가 잠든 스위스 취리히의 묘지에는 오늘날도 그를 흠모하는 작가와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2)토마스 만
토마스 만은 독일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그는 사상적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토마스의 형은 급진적인 작가인 하인리히 만이고, 그의 자녀 중 3명인 에리카 만, 클라우스 만, 골로 만도 작가로 성장했다.
토마스 만은 뤼베크 체육관 기술 분야에 참가하면서 뮌헨 대학과 기술대학에서 역사 경제학, 미술역사, 문학등을 공부하며 언론계로의 커리어를 준비한다.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에서 살았던 1년은 제외하고 1891년부터 1933년까지 형 하인리히와 함께 뮌헨에 거주한다. Simplicissimus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길이 시작되는데, 그의 첫 책은 1898년에 출판된 ‘꼬마 프리데만 씨’이다. 1901년 부유한 상인의 집안이 4대에 걸쳐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부덴브로크스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여 문단에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그는 점차 낭만주의적 반지성주의를 벗어나, <프리드리히와 대동맹>,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등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휴머니즘을 가슴에 품기 시작한다. 그리고 12년간의 노력 끝에 1924년, 장편소설 <마의 산>을 발표한다. 이는 손꼽히는 발전 소설로, 독일 문학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33년 나치 정권 성립으로 그는 남프랑스, 스위스 등을 거쳐 1938년 미국에 이르게 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업을 하게 된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때, 높은 휴머니즘의 이방에서 민주주의 옹호를 위해 싸웠다.
그의 작품으로는 <꼬마 프리데만씨>, <부덴브로크가>, <토니오 크뢰거>, <대공전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마의 산>, <요셉과 그의 형제들>, <Das Zauberberg>, <바이마르의 로테>, <Die vertauschten Kopfe-Eind indische Legende>, <파우스투스 박사>, <거룩한 죄인>,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등이 있다.
조셉캠벨을 여러 번 만났다. 그리고 그의 책이, 그의 말이, 그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문득 내가 이토록 좋아하고, 내게 깊은 영감을 가져다 준 그가 살면서 그에게 이와 같이 영향을 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졌다. 마침 <신화의 힘>이란 책에 그가 평생 배웠다는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보았다. 다음엔 이들의 책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이런 종류의 모험의 첫 번째 단계에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자기에게 버릇 들어 있는 곳, 일정한 수준의 힘을 행사하던 곳을 떠나 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의 문턱에 이릅니다. 이 문턱이 말하자면 호수나 바다의 가장자리이지요. p269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제게, “그래, 조지 루카스의 상상력도 좋고, 조셉 캠벨의 신화학도 좋아. 하지만 그게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내가 장담하거니와, 상관이 있어요. 이걸 깨닫지 못하면 그런 말을 한 사람도 다스 베이더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기던요. 삶을 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다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0
하지만 이 새로운 진실의 도전에 맞서고, 자기 삶을 여기에다 맞추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아니겠습니까?
천만에요! 그렇지가 않아요. 스승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소수겠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것에 반응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아이가 위험에 처할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나가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이와 같아요. 이런 능력은 우리 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자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잇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선생님의 이른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일입니까, 삶입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p272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p273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에게, “미궁에서 나오는 방법만 가르쳐주면 영원히 사랑하리라”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줍니다. 테세우스는 미궁으로 들어갈 때 이 실타래의 실을 풀었다가 그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빠져나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실밖에 없었다”고 하셨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것뿐인 것 같은데요.
그래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뿐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으 ㄹ헤매지요.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p275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p276
어릴 때 읽은 인디언 이야기에서 참 인상적인 대목이 기억나는 군요.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 였지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p279
거웨인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석가가 취한 방법을 택하건 거웨인이 취한 방법을 택하건 욕망과 공포라는 이 무서운 계곡을 벗어나야 성취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p283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낙타에게 ‘그대의 미래’는 낙타를 순치하는 수많은 ‘강제’인겁니다. 낙타는 이 순치를 통하여 인류의 동물에서 문명화한 인류의 동물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p284
행복에 대해서 신화는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제가 만일에 젊은 사람이고 젊기 때문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신화는 이 경우 저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신화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좇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행복을 좇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러줄 뿐이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민화에는 내가 ‘구혼의 거절’이라고 이르는 모티프가 자주 나옵니다.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로써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287
여자가 물 속에 있었다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여자가 합리적, 의식적인 세계에서 무의식의 강박 충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수중 여행 모티프는 거의 다 이런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지요. 결국 개성이, 의지로 통제가 가능한 영역에서 초개성적인 충동의 영역으로 함몰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것은 개인에 따라 통제가 가능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이 이로쿼이즈 인디언의 이야기는 꽤 깁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여자가 천상계의 권능자들을 섬기다가, 이들을 이용하여 심연의 부정적인 권능자들을 쳐부수고는 소낙비를 타고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여행을 상상 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그런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가만히있으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으면 좋을 텐데요.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면 자기 나름의 모험에서 공급되는 삶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은 곧 말라버려요. p292
“거룩한 분입니다. 저분은 이 세상의 삶을 등졌기 때문에 욕망도 공포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자는 돌아오면서 자기도 아버지의 궁전을 떠나 삶의 고통에서 놓여나는 길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합니다. p295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p296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 p298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 안에 정점이 있다는 건 거의 확인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p299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예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p301
결국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잠재력은 기억이라는 튼튼한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하면 이걸 열 수 있습니까?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이런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총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디다.정말 많은 선생님을 만나는 은혜도 누리기는 했지만요. p302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p303
6.조화여신의 은혜
이집트의 어느 신전에서 누트의 이미지를 본 순간에 거기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p306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307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에요. p319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에요.
말씀이 빛줄기로 들어갔다는 것이군요. p320
형상을 부여한 존재로서의 여성이지요. 여성은 생명에 형상을 부여했기 때문에 <베다>시대의 남성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었던 거지요. 이 세상 만물의 존재가 비롯된 곳은 남성과 여성이 분화되지 않은 곳, 그러니까 성 너머에 있어요. 그곳은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해 있어요. 그러니까 존재하는 곳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범주를 훨씬 초월해 있는 것이지요. p333
신화는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약도까지 그려주고 있어요.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약도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이 약도라고 하는 게 다 같지는 않아요. 약도 중에는, 자기네 무리 안의 일만 관심을 두라고 하는 것도 있고, 자기네 종족신만 섬기기를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계시가 담긴 약도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은 요구합니다. 이 약도는,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p335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p337
7.사랑과 결혼 이야기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5
그런데 단테는 무슨 사회학자처럼 프란체스카에게, “아가, 어째서 그렇게 되었느냐? 보아라, 이 꼴이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카가 그 내력을 잠깐 이야기하는데, 이 대목은 단테의 <신곡> 중에서도 명구로 꼽힙니다.
“저와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 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이 둘의 타락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지요. p348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 이 세상에서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그래요. 바그너는 트리스탄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되지요.
“나의 사랑이 있어야겠다. 나의 인생이 있어야겠다”, 이런 뜻이겠지요.
그렇지요.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이런 거지요. p349
음유시인들의 의도는 남의 가정을 부수거나 세상을 부스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사랑이나 욕망을 과녁으로 삼은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혼을 침묵시키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랑의 경험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인간의 정제하는 힘으로, 인간을 더 높은 존재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대놓고 찬양했다. 그들은 그 힘이 사랑을 통하여, 개인의 고뇌와 기쁨을 통하여 마음을 인간 존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가락으로 여는 것이라고 믿었다.”
음유시인들의 가슴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에요.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에요. p355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중세의, 창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관련된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창에 상처를 입지요? 이 세상에 그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그 창을 상처에 문지르는 것뿐이다. p356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 곧 황무지 아닙니까? 황무지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입니가?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황무지를 통하여 엘리엇이 표현하려고 한 것도 바로 이겁니다.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들어봤을 겁니다.
그렇다면 성배는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성배는, 뭐라고 할까….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인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이교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에덴 동산 언저리에서 온 인간을 상징합니다. 이 이교도 기사는 자연인을 상징합니다. 왜? 이 기사의 창 끝에는 ‘성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까요. 무슨 뜻일까요? 자연이 성배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토마스 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말은 성배의 상징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까? p358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p359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체험을 획득하기 위해 숲 같은 데로 운둔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최초의 성인이 바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이 분은 그리스도와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는 분이자 육신의 세계에 현현한 성령입니다. p363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종류의 관계도 상당히 깊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 삶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족을 발견 해 올 때, 여기에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p364
결혼에서 연애 감정은 끝납니까?
어떤 결혼에서는 그렇고, 어떤 결혼에서는 안 그렇죠. 그러나 음유시인 전통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었어요.
성실이라면요?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p365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p366
이 세상에도 지옥은 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채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탄이 신의 애인이었다는 이 페르시아 신화를 좋아하는 겁니다. p371
페르시아 신화에는 최초의 부모 이야기도 있지요. 아마?
그것도 재미있지요. 이 부모가 태초에는 하나였어요. 하나가 일종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가 분리되고 나서 다시 화합하여 자식을 낳았지요. 그런데 자식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나머지 이들은 그만 자식을 삼켜버리지요? 그러자 신은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싶은 생각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99퍼센트, 혹은 10분의 9쯤으로 줄여버렸지요. 부모가 자식을 삼켜버리지 못하게 말이지요. p372
8.영원의 가면
여러 <우파니샤드> 중 하나에서 적절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p375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p379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랜 명상을 경험하고 나오면 말이지요, 자기의 모든 것을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주어버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지요. p382
그런 삶이 본원은 무엇입니까?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 하나의 삶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던지지요. 사람의 현상을 놓고 자꾸만 그러한 현상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 하느님이 만드신 거야”, 이러고 말겠지요. 이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본원인 겁니다. p387
돌고, 돌고, 또 돌 뿐이지요.
11월, 12월 같은 ‘월’만 도는 것이 아닙니다. 달도 이울었다가는 다시 차고, 해도 저물었다가는 다시 떠오릅니다. 시계에서 시간이 도는 것을 볼 때도 우리는 이런 느낌을 경험합니다. 어제와 같은 시각이기는 한데, 날은 다른 것입니다. p390
결혼 반지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는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상징’이라는 말은 ‘둘을 서로 엮는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반쪽과 또 하나의 반쪽이 서로 엮이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반지를 보세요, 완벽한 원형이지요? 이 반지를 보고 있으면 원이라는 게 두 반원이 엮이어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는 결혼입니다. 둘로 이루어진 더 큰 하나, 여기에서 나의 개인적인 삶이 생겨납니다. 결혼 반지는, 우리는 원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p391
‘만달라’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원’입니다. 그러나 만달라의 원은 그냥 원이 아니고 다른 원과 상호 관계하거나 상징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합니다. 만달라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작용하게 합니다. 가령 아주 정교한 불교 만달라를 보면 중심에 힘의 근원이자 깨달음의 근원인 신이 있습니다. 주변 이미지는 그 신의 드러남, 혹은 그 신이 지니는 빛의측면이지요. p392
범용해 보이는 것에 깨달음의 촉매라는 가치를 부여하면 이때부터는 이 범용해 보이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p393
나이지리아의 장난꾸러기 신 에드슈 이야깁니다. p396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모이어스 씨,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제인 존재를, 우리 나름의 표현법을 통해서 그려내려고 하는 일에 지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주제는 아닌 것입니다. p410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p411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들어 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 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p412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413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제 믿음도 이족으로 기웁니다.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p414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p415
3.
내가 저자라면
-대화와 대화체의 사용 : 나는 대담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글을 대화형식으로 쓸 수는 없지만, 글의 중간에 들어가는 대화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메시지의 이미지화 : 캠벨의 대화 중 일부를 인용해서 신화를 이미지화 한 그림들과 매칭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나의 일상의 기록과 그에 잘 맞아 떨어지는 신화를 함께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모습도 보여주고 싶다. 아마 이 이미지에는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내가 깨달은 것들을 신화나 이야기를 통해 좀 더 명확하게 독자에게 전달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인용문의 활용 : 조셉 캠벨의 인생에 영감을 주었던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리고 책, 저자, 그리고 감명 깊은 신화들이 이야기의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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